법령정비 작업과 전기 3사 통합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00조는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 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미군정 법령뿐 아니라 일 제법령과 구한말 법령까지도 의용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9월15일 법전편찬위원회 직제를 공포하여 민사, 형사, 상사에 관한 기본법의 제 정에 착수하였다. 1953년의 형법을 시작으로형사소송법, 민법, 민사소송 법,상법의 순서로 기본법 제정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1951 년 5월12일 대통령령 제499호로 법령정리간행위원회를 설치하고 정부수 립 이전에 제정된 각종 구법령을 번역,폐지, 개정, 제정하는 일에 착수 했다. 이들 업무는 예산의 부족 등의 이유로 진행이 지지부진하여 1961 년 5월16일 군인들이 집권할 때는 '이 나라가 아직도 영어와 일어로 쓰 여진 법령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다'는 분노를 자아낼 정도였다. 이석제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은 이 법령정비도 군사작전식으로 밀어붙였다.
혁명정부는 1961년 7월15일 법률 제659호로 구법령정리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제정하여 1962년 1월20일까지 정리되지 않은 구법령은 모두 실 효시킨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기존의 법령정리위원회를 개편하여 내각수 반소속으로 두고 내각사무처장을 위원장으로 했다. 정부는 6개월의 시한 을 정해두고 각 부처에서 만들어 올린 법령안을, 국회기능을 대신하고 있던 최고회의에 올려 신속하게 통과시켰다. 5·16전까지의 13년간 정리 된법률이 1백15건이었는데 혁명정부가 6개월간에 정비한 법률은 3백52건 이나 되었다. '법제처 50년사'는 이 작업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구법령정리사업이 1962년1월20일에 완료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독립 된 법치국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모든 법령이 헌법을 기본으로 하 여 그 하위법령으로서 법률, 대통령령 및 총리령, 부령이라는 법체계가 확립되었다.>.
혁명정부가 실시한 개혁 가운데 요사이 말로 하면 구조조정에 해당하 는 것이 전기 3사통합과 한전의 탄생이다. 혁명정부의 상공부 장관은 정 래혁 소장. 육본 군수참모부장을 거쳐 국방대학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 던 중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일본 육사에서 박정희보다 한 기 후배로 공 부한 그는 군내에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이름 나 있었다. 정장관이 맡은 상공부는 공업입국을 표방하게 되는 혁명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부서였다. 당시 많은 군인들은 공업화의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 다. 정 장관은 국장회의를 소집해 보고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국방대학원에 다닐 때 강사로 나왔던 함인영 국장이 공업국장으로 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씨는 일반적인 비관론과는 다른 아주 낙관적인 강연을 하여 정 장관은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나라를 공업화의 불 모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물론, 일본과 대만에는 뒤지지만 공업화 를 할 수 있는 싹이 있습니다.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지은 한국유리, 동 양시멘트가 있고 미국 원조자금으로 지은 충주 비료공장도 있습니다. 이 런 시설들을 운영한 경험을 잘 살려서 우리도 한번 해볼 수 있습니다'.
정래혁 장관은 간부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많은 계획을 세워서 책상 서랍속에 넣어둔 줄 압니다.지 금부터 그것들을 다 꺼내 햇빛을 보도록 합시다. 내가 밀어드리겠습니다'.
당시 상공부의 4대 현안은 전기 3사통합문제, 중소기업 금고 설치안, 석탄증산, 그리고 공기업의 활성화였다. 혁명정부는 대부분의 공기업 사 장들을 장교들로 교체한 뒤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전력의 생산, 공급을 맡은 전기회사는 조선전기, 경성전기, 남선전기 로 분리되어 인력과 시설의 중복과 낭비적 운영이 심했다. 정부도 이런 폐단을 일찍 인정하고 1951년5월23일의 국무회의에서 3사 통합을 의결했 지만 민간주주들과 노조의 반대로 그 뒤 10년간 이루어지지 않았다.발전 설비 용량에 대한 발전율은 광복 전엔 55% 이상이었으나 광복 후엔 한때 11.7%까지 떨어졌다. 송배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전력손실률은 41.7%나 되어 선진국의 세 배였다. 1959년말 현재 전기 3사의 누적 적자는 49억 환이나 되었다. 민주당 정권도 비능률의 화신처럼 된 전기 3사의 통합을 다시 추진하다가 군사혁명을 만났다. 정래혁 장관에 의한 통합작업도 군 사작전처럼 진행되었다.
먼저 전기 3사의 사장들을 군인들로 교체했다. 조선전기 사장엔 황인 성, 경성전기 사장엔 조인복, 남선전기 사장엔 김덕준을 임명했다. 이들 은 6월8일까지 노조를 해산하고 종업원 1천6백54명을 감축했으며 민간주 주들의 반발을 침묵시켰다. 6월21일까지 열번의 회의를 통해서 통합에 따른 사무처리를 마무리짓고 23일엔 최고회의가 한국전력주식회사 법안 을 의결, 공포함으로써 전기 3사는 해산되었다. 한전사장엔 9사단장 박 영준 소장이 임명되었다. 민간 정부가 10년이 걸려도 해결하지 못한 일 을 한 달만에 치러냈다. 통합에 의해 능률적인 조직으로 재탄생한 한전 은 그 뒤 공업화의 동력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6월18일자 조선일보엔 '5·16 이후의 농촌'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 다. 사회부 목사균 기자의 경기도 용인지역 르포기사이다. 이 기사는<초 근목피로 연명해가던 보릿고개에서 군사혁명을 맞은 농군들은 '어려운 사람은 언제나 어렵게만 살아야 한다'는 지난날 자포자기했던 버릇을 버 리려고 꾸준히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군복무경험을 가진 농민들 은 군인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어 지도만 잘 하면 물불 안가리고 일할 준 비가되어 있다>라고도 했다.
<농민들은 혁명정부의 강력한 추진력에 감탄하고 있다. 게다가 40대 까지의 농군들은 거개가 '한번 한다는 것은 끝내 실천하고야 만다'는 군 부본연의 생리를 알고 있으며 철석 같이 믿고 있다. 이들은 군에서 명령 에 복종해야 강군이 된다는 것도 알았고 어떻게 해야 농민이 잘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간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농군의 생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묵묵히 일하는 것만이 그들의 대표적인 생활태도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