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민정이양론의 대두
AP통신은 6월1일 혁명정부가 '오는 8월15을 전후하여 정권을 민간과 도정부에 이양하는 것을 검토중이다'고 보도하여 박정희-김종필을 중심 으로 한 혁명주체들을 흥분시켰다. 다음날 최고회의 대변인인 원충연 보도국장은 이 외신보도를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권이양은 사회 각 분야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단행되어 북괴의 경제력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후가 될 것이다.>.
심흥선 공보부장도 기자들에게 '현 내각이 바로 과도정부'라면서 '민간인으로 구성되는 또다른 과도정부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윤보선 대통령은 월례기자회견에서 정권이양이란 상당히 민감한 분야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는 우선 '조속한 기간내에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할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 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프랑스 드골 헌법을 참고로 해볼 만하며 양당제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윤대통령은 또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악을 전광석화(전광석화)와도 같이 제거하는 것을 국민들이 쌍수를 들어 지지하는 줄 믿는다'면서 '군정기간에 공산 당을 깨끗이 청소해 주어야겠다'고 주문했다.
윤 대통령은 군사혁명에 대해서 '올 것이 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 렇게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이면 10년 걸릴 일들을 10일 동안에 해놓으니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혁명정부는 윤 대통령의 기자 회견에 대한 불만을 이를 보도한 기자 들을 잡아넣는 식으로 표현했다. 회견 다음날 수사당국은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란 제목으로 보도한 동아일보의 김영상 편집국장, 정경부 이 만섭(뒤에 공화당 의원 역임) 기자가 연행되어 갔다. 6일엔 직접취재를 했던 이진희(문공부 장관 역임) 기자가, 7일엔 조용중(연합통신 사장 역임) 차장이 연행되었다. 이는 정권을 장기간 장악하여국가개조를 하 겠다고 나선 혁명파 장교들이 조기 정부 이양을 요구하는 윤 대통령과 이에 동조하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에 경고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서른 일곱 살의 김종필 중령(그는 혁명 성공 직후 현역으로 복귀했 다)이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언론 앞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6월5일 오후였다. 최고회의 본회의실에서 그는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5·16 혁명 비화를 털어놓고 혁명 정책의 기조를 밝히는 등 실력자로서의 면 모를 과시했다. 그는 혁명비화를 설명하면서 4·19혁명 직후의 8기생 중심 정군 운동을 뿌리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갔다. 그는 '박정희, 장도영 장군은 올해 3월에 가담했다'고 하는가 하면 '특히 장도영 총장 은 정보가 누설될 때마다 잘 커버해주었다'고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혁명의 총기획자이고 박정희는 추대되었을 뿐이란 느낌을 줄 정 도였다. 김 부장은 또 '혁명공약, 초기의 포고령, 국가재건최고회의란 명칭은 내가 기초하여 박정희 장군의 수정을 받은 것이다'고 말하고 '혁명을 구상함에 있어서는 (장준하가 발행하던 월간잡지) '사상계'를 많이 참고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원래는 내각을 구성할 때 45세 이하로 하려고 했었다'고 말하고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또 혁명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은 계획경제의 단계를 거 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정의 전반에 대한 30대 젊은 장교의 소신 피력은 많은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김 부장은 '이번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든 자금의 총액은 860만 환에 불과하다'고 털어놓아 기자들을 웃겼다. 그는 박정 희 장군이 자신의 처삼촌임을 공개하기도 했다.
임시헌법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공포되고 장도영 의장이 국방장관 과 육군참모총장직을 내놓고 박정희 부의장이 최고회의 상임위원장을 겸직한 것이 6월초, 이는 장도영의 무력화를 의미했다. 새로 육군총장 에 임명된 김종오 장군과 송요찬 국방장관은 박정희-김종필 세력에게 도전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혁명주체 젊은 장교들에게는 한때 정군 대상으로 여겨졌던 인물이었다. 혁명주체 세력안에는 장도영 의 처지를 동정하는 장교들은 몇 있었으나 그를 지지하거나 충성을 맹 세할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장도영 자신도 박정희와 김종필의 독주 에 불평을 할 정도였지 지지세력을 규합할 권력의지가 없었다.
실권없는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은 조기계엄해제, 조기민정이양, 과 격한 농어촌 고리채 정리의 완화, 무리한 부정축재처리의 완화 등을 주 장하는 등 온건한 조치를 강조했으나 그때마다 청년장교들에 의하여 무 시당했다. 6월8일 그는 박정희 부의장을 불러 '나는 의장직을 물러나겠 다'고 선언했다.
'최고회의 의장은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이 맡아야 합니다.'.
장도영은 그러고는 중앙청 총리실에서 기거하면서 내각수반직만 수 행하기 시작했다.
총구로써 정권을 탈취한 군인들은 차츰 사회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새 로운 논리가 적용되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대강 그기점은 5월18일이었다. 이석제 중령은 정권 탈취가 일단락된 날의 감 회를 이렇게 적었다.
<5월18일 아침,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육군본부 뜨락을 산책했다. 나뭇가지에서 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풀 한 포 기의 생명력에 가슴벅찬 희열을 느꼈다. 산천초목이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가 없었다.>.
새로운 정권도 새로운 생명체처럼 새로운 생리와 조건을 가진다. 18 일까지가 정권을 물리력으로 뒤엎는 혁명의 시간대였다면 그 뒤로는 국 가관리의 시간대였다. 혁명의 시간대엔 돌파력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 이 필요했지만 관리의 시간대에선 관리-경영능력이 필요했다. 김종필, 이석제,오치성, 장경순 같은 장교들이 그런 관리능력의 소유자로서 달 라진 무대에서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유지해간 사람들에 속한다. 머리는 없고 용기만 있었던 장교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용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도태되었다. 대한민국을 접수하여 장관직에서 경찰서장 자리까지 주요 직책을 거의 몽땅 차지한 군인들에겐 또다른 경쟁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