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새로운 한전략
미국은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하자 이 기정사실을 인정한 바탕 에서 계속하여 자신들의 국익을 한국에서 구현 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하 게 된다. 이승만-장면 정부와는 전혀 다른 혈기왕성한 장교집단을 상대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새로운 정책논리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1년 6월 5일 '한국문제에 관한 대통령 직속 긴급조치반'은 백악관내 국가안보 위원회에 한국문제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올렸다. 본문 38쪽, 부속 문서가 100쪽에 이르는 이 자료는 1981년 9월 18일에 비밀분류에서 해제되었다.이 보고서의 핵심인 '서문 및 건의' 부분을 쓴 것은 그때 주한 대사로 내정되 어 있던 사뮤엘 버거였다. 이 긴급조치반의 책임자는 전 주한 미국대사 월 터 P 매카나기였다. 이 보고서는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을 붕괴시킨 힘 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좌절하여 불만이 쌓여가던 민족주의 의식, 젊은 세대의 불만, 국가적 목표의 상실, 국민들의 좌절감'.
이 보고서는 또 '5·16 쿠데타는 소수의 군인들이 잘 짜여진 계획을 세 운데다가 장면 정부가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할 능력에 대한 신뢰감을 국민 들로부터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이승만과 장면 정부를 무너뜨린 이 젊은 에너지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용 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 힘을 통합하여 경제개발과 사회개혁으로 돌리도록 미국 정부가 지 원과 지도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계 속해서 혁명적인 코스를 밟게 될 것이다. 그런 불안정한 정세가 지속되면 북한공산당과 합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군사정권을 지원하여 한국에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승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가지로 설명했다.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일, 미국의 국가적 위신, 그리고 남한의 전략적 가치, 즉 서태평양과 일본의 방어에 사활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점. 이 보고서에는 미국에 고분고분하던 장면 세력과는 달리 박정 희 세력이 민족주의적인 열정으로 무장하고 있어 다루기 어렵다는 우려가 깊게 깔려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장교단이 정부기관에 효율성을 불어넣고 부정부패를 청소할 것이란 기대도 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예언적인 전망 도 했다.
<진취적인 지도력, 동기부여, 사회적 통합, 그리고 확실한 국가목표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열정이 조직된다면 한국인들은 현재의 좌절감과 자학 의식을 청산하고 경제를 향상시켜 안정된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시대적 낡은 전통의식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문화적 가 치 체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 보고서가 대한 정책의 새로운 기본틀로 제시한 것은 장기 경제 개발 계획의 수립과 실천이었다. 야심만만하고 주체성이 강한 정치장교단을 다 루는 데는 과거처럼 군사원조 중심의 틀로써는 어렵고 경제협력이란 새로 운 틀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하 여'란 항목에서 이 보고서는 이런 요지로 지적했다.
<미국의 힘과 권위, 그리고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이란 수단을 동 원하여 한국인들로 하여금 국가적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인에 대하여 보호자적인 자세를 버리고 동등하게 상대해 야 한다. 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의 수립 실천에 한국인을 대신하여 적극적 인 역할을 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독립주권국가의 시민으로 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경제개발을 실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그쳐야 한다.> 이 보고서는 이어서 앞으로 한국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서 경제적수단을 주로 동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제개발계획은 미국의 대한 영향력이 행사되는 중심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 대표들은 계획과 예산의 수립과정에 상담을 해줌으로써 이계획 의 실적과 원조를 조건부 관계로 연결시킨다. 원조액수를 줄이거나 지급을 일시 보류하는 방법으로써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이 대한 정책건의서는 한국의 교육제도를 개혁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학교교육이 너무 유교적인 전통에 빠져 있어 문학, 철학, 예술 등 인문분야를 중시하고 자연과학, 공학, 행정, 사회과학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술, 직업교육을 강화하여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 이것이 박정희의 근대화 계획서가 아닌가 하 는 착각이 든다. 한국인의 좌절감과 목표상실감을 자신감과 희망으로 바꾸 어놓기 위해서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해야 하고 그래야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는 이 보고서의 기본 인식은 박정희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보고서가 제시한 효율적인 행정의 필요성, 부패추방,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실용주의적인 방향으로의 교육개혁은 박정희가 추진하려던 방향과 같았다. 쿠데타가 일어난지 불과 20일만에 워싱턴과 서울에서는 우연히도 똑 같은 '한국의 비전'을 다듬고 있었다. 쿠데타에 의한 불편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또 박정희의 오기서린 자주노선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한-미 관 계가 기본적으로 같은 궤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국가목표와 그 발전전 략에 대한 공감대가 양국 수뇌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이었음을, 이 보고서는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보고서를 읽어보면 미국 정부는 박정희-김종필 세력의 도전을 계기 로 한국을 대하는 태도를 우월적인 후견인의 시각에서 대등한 동반자의 시 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자각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한국군의 청년 장교단이 미군에 도전하여 쿠데타를 성공시킨 것이 미국 으로 하여금 한국을 보는 눈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는 미국이 태평양전 쟁으로 해서 일본과 아시아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이다. 힘의 대결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은 당돌한 도전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평가를 해주는 것이다. <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