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과 이후락
1978년, 코리아게이트 사건(박동선에 의한 로비사건)을 파헤치던 미 하원 소위원회가 펴낸 '한미관계보고서'엔 이런 대목이 있다.
<(5·16뒤) 중앙정보부는 이후락 소장이 만든 중앙정보위원회를 흡수했다.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모씨는 조사관과의 인터뷰에서 중앙정보위원회가 미CIA와 밀접한 관계를 유 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5·16이 나자 이후락은 부패혐의로 체포되 었다.체포의 진짜 이유는 그가 미국측과 너무 가깝다는 것이었다.몇 달 뒤 군사정권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 환으로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후락을 석방했다. 이 보좌관에 따르면 미 CIA가 이씨의 석방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김봉기(대한공론사 이사장, 유정회 의원 역임)는 김정렬 국방장 관 아래서 준장급 문관으로서 특별보좌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이후락 및 혁명주체들과 친했다. 6월 초 그는 미도파 건너편에 있던 희다방 에서 우연히 김종필부장을 만났다. 김봉기는 이후락을 석방시켜달라 고 부탁했다.
김종필은 '며칠 안으로 석방될 거요'라고 하더니 '지금 대한공론사 이사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 기자경력이 있는 당신이 좀 맡아줘야 겠으니 이력서를 갖다 주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대한공론사 는 정부 투자기업체로서 코리언 리퍼블릭이란 영자신문을 내고 있었다. 김봉기는 며칠 뒤 이력서를 들고 김종필을 만나러 갔다.
'국제호텔 자리에 있던 정글 바(Bar)로 갔더니 김종필은 안보이 고 한 구석에 이후락씨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습니다.반갑게 인 사를 나누고있는데 정보부 서울분실장 이병희씨가 들어왔고 조금 있 다가 김종필 부장이 합류했지요. 저는 김부장과 따로 만나서 '대한 공론사 이사장은 미국인들과 친면이 있는 이후락씨가 적임자인 것같 다'고 했습니다. 김 부장은 이후락씨에게는 '월간 다이제스트'란 잡 지를 하나 만들어 맡길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런 시대에는 월간지가 될 일이 아니라면서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대한공론사를 이 후락씨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한데 이후락씨가 신문사 사장이 란 직함을 가지면 미국측과 접촉하는 데도 편리할 것이라고 했습니 다. 이렇게 해서 며칠 뒤 이후락씨는 대한공론사 사장, 저는 주필 겸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언론사 사장이 된 이후락은 코리언 리퍼블릭을 신문답게 만들었 다고 한다. 정부 홍보 일변도에서 벗어나 객관 보도에도 힘써 한국 거주 외국인들과 외교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군사정부를 비판하기 도 했다는 것이다. 코리언리퍼블릭의 신뢰도가 높아지자 혁명정부에 선 이 신문을 이용하여 외국인들에게 군사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도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대한공론사의 운영에 있어서는 김종필부장이 차량, 예산 등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사장과 부사장 월급은 정보부로부터 지급받아 예산 부족을 메우기도 했다. 이후락씨가 몇 달뒤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된 데는 이러한 실적이 상당히 기여했다고 한다. 김종필 총리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에게 '이후락씨를 제가 잘 아는데 불러다 쓰시겠습니 까'하고 천거한 것도 자신이라고 한다.
'사실은 이후락씨가 갇힐 만한 이유가 없었다고 봐요. 단지 민주 당 시절에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있었던 때문에 혁명에 방해가 되는 일을 했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나는 이 후락씨가 잡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다닐 때인데 이병희 서 울분실장이 와서 그 사람을 잡아둘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후락 씨는 박정희장군도 잘 알고 그분이 정보국 차장일 때 제가 과장으로 모신 적도 있고요, 그래서 내가 만났지요. '격동기가 되다 보니까 일이 잘못돼서 고통을 드린 것 같다'고 하고는 대한공론사를 맡겼던 겁니다.'.
박정희 시절의 2대 조역인 이후락과 김종필은 그 뒤 18년간 애증 이 엇갈리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군정의 조기 종식과 정권의 조기이양 문제로 윤보선 대통령과 박 정희 세력이 갈등을 빚고 있던 6월4일 조선일보는 '군사혁명과 정권 이양 네 나라의 경우'란 제목으로 터키, 이집트, 프랑스, 버마의 예 를 들었다. 이집트 혁명의 지도자 낫세르는 만 5년만에 형식적인 의 회정치로 돌아가면서 헌법을 제정하여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로 갔 다. 버마의 네윈은 쿠데타 3년후 정권을 민간에 넘겨주었지만 군부 의 실력자로 남아 있으면서 정치를 조종하고 있었다. 1년 전인 1960 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터키군부는 가을에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 하겠다고 약속한 가운데 군내의 갈등,폭동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 고 있었다. 3년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주둔군의 반란을 계기로 과 도 정권 담당자로 추대된 드골은 항구적인 정치불안을 해소하기 위 하여 내각제를 대통령중심제로 개헌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그는 군 부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알제리에 독립을 허용하는 정책 을 추진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전에는 버마식 군부통치를 선호했으나 정권을 잡은 다음엔 군이 병영으로 돌아가서는 민간정부를 조종할 수가 없 다는 판단을 내린다. 혁명주체들은 드골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보수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규합한 드골과 프랑스의 안정된 권력구 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의 최 고고문으로 발탁되었던 유진오 고려대 총장은 6월1일 AP통신과의 회 견에서 '드골헌법과 유사한 권력구조로서 정권이양을 할지도 모른다' 는 요지의 발언을 했었다.
6월27, 2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박정희 부의장의 특별 기고 '지도 자도'에서 그는 우리 국민의 전반적인 수준은 자유민주주의를 실천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단정했다.
<우리 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강력한 타율에 지배받던 습성이 제 2의 천성으로 변하여 자각, 자율, 책임감은 극도로 위축되어 버렸 다. 책임감 없는 자유가 방종과 혼란과 무질서와 파괴를 조장시켰 다. 인권존중사상이 토대가 되어야 할 민주주의는 모략, 중상, 무고 로 타락해 버렸다. 의무감이 박약한 권력층은 국민과 유리되어 권력 을 남용하고 부패분자들과 결탁하여 거부를 축적했다. 경제인들은 정치인과 결탁하여 부정융자, 탈세, 밀수, 재산의 해외도피 등 악랄 한 수단을 동원하였고… 지도자는 대중과 유리되어 그 위에 군림하 는 권위주의자나 특권계층이 아니라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 지도 자는 모름지기 대중속에 뿌리박아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이 정권 과 장 정권의 전철을 밟게 될 뿐만 아니라 조국을 소생시킬 방도를 잃게 될 것이다.
지도자는 대중과 항상 호흡을 같이 하며 그들이 가 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여 가장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고 자기가 확신하는 방향과 가 장 가능한 방법에 대하여 납득시킬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협력을 자 극하고 이끌고 나갈 용기를 가진 자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