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의장 취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지휘한 문재준 육군 헌병감-박치옥 공수단장, 그리고 장도영 측근 세력 거세작전은 1961년7월2일 밤에서 다음날 새벽 에 걸쳐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문, 박 두 대령을 비롯하여 내각수반 비서실장 이회영 대령,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안용학 대령 등 40여명이 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되어 반혁명 혐의로 구속되었다. 장도영은 연행 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3일 아침 장 도영이 최고회의 회의장으로 나갔더니 상임위원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부의장 겸 상임위원장은 보이지 않았다. 선임 상임위원 이주일 소장이 말을 꺼냈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각하께서도 사표를 내셔야 하지 않겠습니 까.' '나는 이미 사의를 표한 지 오래요. 잘 됐소.'.
회의를 1분만에 끝낸 장도영 장군은 육성으로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본인은 혁명초부터 혁명정권의 책임자로서 그 중책을 감당하지 못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초 비상시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 하여 잠시 그 직책을 맡았던 것이다. 이제는 신망있는 지도자가 그 직 책을 맡아야 할 것이므로 나는 사임하는 바이다.'.
장도영은 중앙청 내각수반실로 돌아가 업무정리를 마쳤다. 7월1일자 로 서독대사로 임명된 신응균 장군이 인사차 찾아왔다.
'축하합니다. 일 많이 해주십시오.'.
장도영은 총리실에서 현관으로 나와 신응균과 헤어진 뒤 원효로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피 로하고 긴장된 심신을 풀었다. '차츰 심신의 피로가 풀리면서 자연히 참모총장 재직시에 일어났던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 곤란했던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특히 5·16 이후 오늘까지 49일간 내가 겪은 모든 간 난과 신고를 하나씩 회상해보았다'는 것이다. 장도영은 그 뒤 가택 연 금상태에서 지내다가 가을에 반혁명혐의로 구속된다. 1986년에 한 기자 가 김종필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장도영 장군을 명예롭게 퇴진시킬 수는 없었습니까. 그래도 혁명에 앞장을 서 준 분이 아닙니까.'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 았느냐하는 데엔 동감입니다. 그런데 그건 나의 회고일 뿐이지 한 시대 를 전환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게 혁명인데 그땐 그런 여유가 없 어지요. 당시엔 이기고 누르고 바꾸고 나가야 할 긴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김포 주둔 해병여단장으로서 혁명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윤근 최고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도 장도영과 그 측근들을 거세한 직후 상임위원들을 불러 전후 사정을 설명해주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김윤근은 박정희가 과거에 장도영에게 많은 신세를 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박 장군이 지나치게 괴로와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3일 오후 최고회의는 장도영 의장의 실각을 발표했다. 장도영의 사 표는 수리되었고 박정희 부의장이 의장에 취임했고, 내각수반엔 송요찬 국방장관이 임명되었으며 최고위원 송찬호, 박치옥, 김제민은 그직을 사임했다는 발표였다. 박정희는 취임사를, '배수의 진을 친 우리들에게 는 이제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전진이 있을 따름입 니다'로 끝맺었다.
박정희는 7월7일 전국 수사기관장 회의에 참석하여 훈시를 했다. 그 는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군인들에 대해서 주로 경고했다.
'자가정화와 자가단속을 철저히 하라. 점차 정부에 참여한 군인들 수를 줄이겠다.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현재의 수사기관을 정비하겠 다. 한 명의 수사대상자에게 두 개 이상의 수사기관이 중복수사를 벌여 국민들을 불편하게 해선 안되겠다. 혁명초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옥석을 가리지 못하고 처리하는 것이 항례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옥석을 가 려야한다. 우리의 혁명목적은 어디까지나 국민에게 봉사하려는 정신에 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혁명정신을 살려서 일반 국민에게 친절하 고 겸손해야 한다.'.
최고회의는 7월9일 비로소 '장도영을 비롯한 44명의 반혁명 세력을 지난 3일에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장도영만을 가택연금시키고 나머지 인사들은 엄중 문초중인데 혐의는 '반혁명 세력 구성' '박정희 암살 기 도'란 것이었다. 발표문은 새삼스럽게 5·16거사를 전후한 장도영의 기 회주의적 행동이란 걸 공개했다. 7월16일 사뮤엘 버거 주한미국 대사는 박정희 의장을 방문, 요담했다. 버거는 박의장에게 군정을 끝내고 민정 으로 복귀하는 문제를 논의할 군민합동기구를 구성하여 그 과제를 연구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버거 대사는 또 '미국 당국 이 공개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고 싶어도 체포, 숙청 등이 되풀이 되고 있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최고회의가 긍정적인 조치 를 취해주면 자신도 한국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혁명정부는 예비검속한 용공혐의자 3,098명 가운데 이미 두 차 례에 걸쳐 석방한 1,267명 외에 1,293명을 추가로 풀어준다고 발표했 다. 이발표문을 통해서 박정희는 이렇게 당부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방면되더라도 지난 날의 잘못 을 깊이 반성토록 촉구하심과 아울러 따뜻한 아량으로 대하여 주시어 지난날에 포지하였던 용공적이고 불순한 생각을 버리고 애국심에 불타 는 선량한 국민이 되도록 선도하여 주시기 바라며 앞으로 이러한 반 국 가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항상 엄중한 경계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 다.>.
19일 오전 박정희 의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앞으로 출범할 민정의 형태와 시기에 대해서는 8월15일 전에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고 했다. '한국 신문이 정부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는 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혁명 후 1주일만에 보도통제를 해제했다. 정부가 두려워 논평을 하 지 않는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사실이라면 언론인들의 기개가 부족한 탓이다. 언론인들이 혁명과업에 직접 참여해주기를 바란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