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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과 문인
 군인과 문인
 
 독서량이 많은 박정희는 혁명 전에도 문인들과 친했다. 시인 구상·이용상, 소설가 장덕조·김팔봉 등은 군인 박정희의 교양 에 깊은 인상을 받고 대화의 상대자가 되었던 이들이다. 박정희 는 이런 문인들을 가까이하면서 군인들로부터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얻으려고 했다. 시인 구상은 친구의 거사를 맞은 소감을 자전적 시로써 표현했다.
 
 <나는 5·16아침을 어느 무희집에서 맞았다. 그녀는 아침 화 장을 하면서 방송을 들으며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요?선 생심 신상에 행여나 해나 없을까요?'하고 연거푸 물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말 째찍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느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떼들을 보네'-그 친구 의 일본시음을 흉내내어 새벽의 한강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용상은 박정희를 '지만 아버지', 구상은 박정희를 '박첨치' 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용상은 5월16일 밤에 구상의 집을 찾아 갔다. 구상은 첫 마디가 '박첨치 그 친구 빨갱이 아닐까? 이북 과 무슨 선을 대지 않고서야 어떻게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겠는 가?'였다. 신라통일 이후 우리나라는 문민통치의 전통을 이어 왔다. 약100년에 걸친 고려 무신통치기가 유일한 예외였다. 이 런 역사적 풍토에서 대부부의 우리 민간인들은 군인이란 종류의 인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 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의 쿠데타는 무인통치가 정상인 터 키나 일본의 쿠데타와는 그런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우리 민족사의 생리에 비추어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 고 그만큼 문민(또는 문인)의 저항은 극렬해진다. '쿠데타가 엉 뚱하다'는 구상의 첫 반응은 우리 정치사에 이물질처럼 들어온 군인들에 대한 역사의 거부감, 그 조건반사적 표현이었을 것이 다.
 
 그 사흘 뒤 구상은 박정희와 만나는데 '모과(목과)옹두리에 도 사연이'란 자전시집에서 이렇게 썼다.
 
 <그와 마주앉은 것은 5월19일 저녁, 기 총을 실은 장갑차가 마당에 놓인 어느 빈 호텔의 한 방, 그도 나도 잠자코 술잔만을 그듭 비웠다. 마침내 그가 뚱단지같은 소리를 꺼냈다.
 
 '미국엘 좀 안가 주시렵니까?'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하다못해 양식탁의 매너도 모르는 걸요!'.
 
 '그럼 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주셔야지!'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얼핏 들으면 만담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술잔을 거듭 비웠다.>.
 
 박정희는 구상을 최고회의 의장 상임고문으로 내정하고는 친 지들을 통해서 설득했으나 구상은 경향신문 도쿄 특파원을 자청 했다. 떠나기 직전 만난 두 사람은-.
 
 <궁리 끝에 신문지국 간판을 메고 유 의 길에 오르듯 '도오 꼬오'로 향했다.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 의 이상 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비행창으로 구 름밭을 내다보며 그 현실로부터의 격리를 확인하면서도 그와의 작별 때 대화가 내 뇌리를 후벼팠다.>.
 
 구상은 그 뒤 신문사와 천주교회와 관련된 어떤 사건에 휘말 려 마음 고생을 엄청 한다. 자전시에 이렇게 쓸 정도이다.
 
 <내가 희망치도 않은 이해에 얽혀 교회의 암흑면을 체험하 게 된 것은 내 영혼의 치명상이었다. 견월망지! 라는 불도문자 를 되 외우고 되씹고 되새겨도 그 더러운 사제의 손에서 성례 의 비의를 용납할 수가 없었고 도처에 높이 솟아 있는 교회당 들이 회칠한 신의 무덤으로 보여졌다.>.
 
 박정희는 구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 사건을 화제로 삼는다.
 
 <'그 신문사 일 어떻게 되었어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 줄을 쓰는 것밖엔 없나 봅 니다'.
 
 '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어요. 교회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으로 혼들을 내주시죠. 그렇듯 당하고 만 가만히 계실 거예요?' '그럼 어쩝니까? 예수가 왼 뺨을 치면 오른 쪽 뺨을 내 대라고 가르치셨는데야!'.
 
 '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 '그게 바로 천주학의 어려운 점이지요!' '천주학이라!'.
 
 그는 그 말을 되뇌까리면서 더이상 나를 힐난하려 들지는 않았으나 자못내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때 그 는 나를 현실에 이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단념했을 것이다.>.
 
 엘리트 관료의 눈에 비친 군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재무차관은 이한빈(경제부총리 역임)이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을 졸업한 첫 한국인이다. 그는 재무부 예산국장 시절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5·16을 만났다. 귀국하여 승진, 군인장관들 아 래서 일하는데 많은 장교들과 강연을 통해서 친면을 익혔다. 송 요찬 내각수반도 자유당 시절 이한빈으로부터 기획예산제도에 관하여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송수반이 급히 이차 관을 찾았다. 송요찬은 이한빈이 들어오자 회의탁자 위에 넒은 브리핑 용지를 펴놓고 붉은 연필 한 자루를 그의 손에 쥐어주면 서 이렇게 말했다.
 
 '이 차관, 이제 정부 각부에 기획조정실을 창설해야 하겠는 데 그 기회조정관은 장관 차관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이 될 것이 오. 각 부의 국장급에서든지 전직자라도 좋으니 가장 유능한 사 람의 이름을 적어보시오.'.
 
 이한빈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망연히 앉아서 망설였다. 송 수반은 '지금 바로 정해서 오늘 근무시간내에 발표하려고 하니 빨리 적어보라'고 재촉했다. 이한빈은 적어내려갔다. 김태동,김 영주, 이철승, 이창석, 강봉···. 다음날 이한빈은 인사 발표 를 보고는 두번째로 놀랐다. 자신이 써준 그대로 방이 붙은 것 이다. 이한빈은 '참으로 혁명정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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