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비밀접촉
1961년의 남북한간 공업수준을 비교하면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 했다. 석탄생산량은 남한이 590만t, 북한이 1,200만t, 발전량은 남 한이 약 20만 킬로와트인 데 비해서 북한은 116만 킬로와트였다. 철 광석의 생산실적은 남한이 약14만t, 북한이 116만t. 화학비료는 남 한이 연산 3,8000t인데 북한은 86만t, 시멘트는 남한이 약51만t, 북한이 207만t이었고 수산물생산량도 북한이 59만t으로 남한의 45만t 보다 앞서 있었다. 곡물생산량에서만은 남한이 600만t, 북한이 220 만t으로 남쪽이 많았으나 농가구당 소, 돼지 사육수는 북한이 많았다. 이즈음 김일성은 이렇게 호언하고 있었다.
'우리 당의 구호는 지금 사상에 있어서는 주체, 정치에서는 자주, 경제에서는 자립이다.' '우리는 5∼6년전부터 쌀을 수입하지 않는다. 남조선 군대가 먹 고 있는 것은 전부가 미국의 잉여농산물이다. 남조선의 국방군이 입 고 있는 것도 전부 미제이다. 군화도 미제이고, 총과 탄약도 미국놈 들이 준 것이다.' '남조선에서 박정희가 중농정책을 들고나와서 자립경제를 건설하 겠다고 떠드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는 그런 정책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자립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돈으로 세울 수는 없다. 그 렇게하면 식민지가 된다. 우리 북반부와 합작해야만 자립경제가 가 능해진다. 합작에는 그러나 하나의 조건이 있다. 미국놈들을 반대하 고, 일본군국주의에 반대하며, 오로지 인민을 위하여 투쟁한다는 조 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합작은 무리다.남조선 당국은 우리에게 '북 조선군대를 먹여주겠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처럼 물질적인 힘, 경제적 자립이란 중요한 것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하에서 5·16쿠데타가 터지자 함흥지역에 현지 지도차 내려가 있던 김일성은 대남 공작총본부인 3호 청사의 정보망 에 비상을 걸었다고 한다. 그는 평양으로 급히 돌아와 당 정치위원 회를 소집했다. 3호 청사의 문화부장인 김중린이 '박정희 소장과 육 사 8기출신의 소장 장교들이 움직였다는 정보가 있다'고 보고했다.
김중린은 김일성이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하고 물었을때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박정희에 대한 신상자료를 갖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3호 청사의 간부로 있으면서 이날의 회 의자료를 준비했던 전북한 고위관리 황일호(해외 거주)가 중앙일보 취재반에 증언한 내용은 이렇다.
'김일성의 지시로 박정희를 포함한 쿠데타 주요간부 8명에 대한 신상자료가 회의에 제출되었어요. 당시 한국군 장성들이 많지 않았 기 때문에 그들 개개인에 대한 세세한 신상자료가 마련되어 있었어 요. 박정희 자료는 주로 경북출신의 남로당원과 국군장교였다가 월 북한 사람들이 쓴 것이었어요. 그 중 70%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5월20일과 21일에는 노동당 본청사 회의실에서 남한사태에 대한 전문가들의 정책토론회가 벌어졌다. 황일호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는 쿠데타가 미군의 사주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민족주의적인 청년 장 교들이 일으킨 것이냐로 성격규정을 하느라 옥신각신했다고 한다.미 군이 개입한 쿠데타로 결론은 났지만 주체세력들의 면면들을 볼 때 더 신중하게 조사해야 한다는 견해도 많았다고 한다. 5월26일, 노동당 대남연락부는 박정희를 어려서부터 지켜봤다는 황태성과 박정희 와는 육사2기 동기로서 6·25전에 대대병력을 끌고 월북했던 강태무 등 14명을 평양여관 특호실로 소환했다. 이들은 주량, 버릇 등 박정 희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를 세밀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북한 수뇌부는 박정희와는 대화가 될수 있다는 희망적인 관측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통일운동세력과 용공세력을 숙청하 기 시작하자 회의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박정희의형 박상희의 친 구였던 황태성이 박정희를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데 앞장섰다고 한 다. 그 해 7월 노동당 정치위원회는 '박정희가 반공을 표방하고 있 고 혁신계를 탄압하고 있지만 우리와 통일문제를 협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화통일을 제안할 비밀협상대표를 파견키로 하자'는 결론 을 내렸다는 것이다.
5·16 때 육군방첩부대장으로서 박정희의 쿠데타를 막는 입장에 있었던 이철희 준장은 육군첩보부대장으로 옮겼다. 7월경, 육군 첩 보부대(HID) 서해지구 파견대는 흥미 있는 대북공작을 시작한다. 이 공작의 지휘부에 있었던 이모씨(예비역 대령)는 암호명이 '213-해상 공작O호'(정확한 번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함)였다고 증언했다. 국 제문화협회란 단체명으로 위장한 우리 첩보부대는 남북한을 오가는 이중첩자를 통해서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인 대동강상사에 '정치회담' 을 제의했다.
우리측의 목적은 정치회담으로 위장한 정보수집이었는데 박정희 측이 정말 회담을 제의해오니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북한은 액면 그대로 정치회담이라 믿었던 것 같다. 이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정치회담이란 발상을 누가 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첩보부대가 대북공작차원에서 생각해낸 거라고 보면 됩니다. 혁명 직후라 아무 래도 북한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정보를 수집하려고 애쓸때 였습니다. 여러 차례 첩보원들을 북으로 침투시켜도 모조리 붙잡히 는 등 차질을 빚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저들과 접촉 하면서 우리가 북침의사가 없고 평화통일을 원한다는 뜻도 전하면서 혁명정부가 안정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계산도 있었을 것입니다.'.
첩보부대는 별 기대도 걸지 않고 회담을 제의했는데 의외로 북측 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이에 우리측은 회담 대표를 민간인에서 선발 했다. 첩보부대가 선발한 민간인은 서울시 의원을 지낸 적이 있는 강성국(당시 35세)과 3대 광주시 의원을 지낸 김석순(김석순·당시29 세)이었다. 강씨는 대표단장(중령), 김씨는 보좌관(대위)으로 위장 했다. 강씨를 첩보부대에 추천한 것은 방송극작가 이영신이었다. 서 해지구첩보부대장 이영호 대령은 이영신의 외사촌형이었다. 7월초순 이대령은 부대를 찾아간 이영신에게 '공산주의 이론에 밝고 말도 잘 하고 허우대도 좋은 그럴싸한 사람을 천거해다오'라고 부탁했다. 이 영신이 '이북에 첩자로 보내려고 그러느냐'고 했더니 이 대령은 '그 렇지 않다. 신변문제는 걱정말라'고만 했다.
강성국은 황해도 안악이 고향이고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뒤 모교 에서 조교수로 있다가 4·19이후의 총선 때는 서울 동대문에서 무소 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했다. 이어서 실시된 서울시의원 선거에 당선 된 다음 민주당에 입당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