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미 초청
구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한국과장 출신인 바딤 투가첸코의 증언은 계속된다.
<당시(1961년) 남한 정세에 관한 의견은 단순하였다. 즉 남 한 정부가 미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이 철수하기만하면 인민이 정권을 장악할것이고 북과 통일할 것이란 생각이었다.북 은 남쪽보다 경제발전에서 우세하였고 조선전쟁 때 북으로 올라 온 10만 피난민들도 북반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외에 평양은 남의 좌익세력이 중심주의 당들과 결합하리라는 데 일정한 희망 을 걸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으리라고 생 각했다. 이 모든 사정을 생각한 북한 지도부는 교섭에 동의했다.
그런 접촉은 보통 지도에는 표시되지도 않는 북한의 한 작은 섬에서 있었다. 서울이 제의를 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 대표자들은 상대자들의 의도가 무엇이며 누구를 대표하며 권한이 어떤가 를 알아볼 목적이었다. 남한 장교들은 최고 지도부의 지시로 교섭에 나섰으며 그 명의로 네 가지 사항으로 된 지침을 제출했다.
서울과 평양에 양측 상설 군사대표부를 설치하며, 남과 북이 통상관계를 맺고, 시민들의 38선 자유통행을 보장하며, 우편교 환을 회복할 것 등이었다.
첫 만남에서 상기 제안은 토의되지 않았다. 북측은 남측 군 사대표들의 권한을 밝히려고만 시도했다. 이에 관한 남측 장교 들의 설명은 북한측을 조심하게 만들었다. 남측은 북한 군사단의 서울 체재기간 중 안전은 미국, 러시아 및 중국이 모르는 조 건하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고 했다. 북한 지도부는 10월초의 회담에서 정부급의 회담으로 격상시키는 가능성을 검토하자고 제 의했다. 10월24일에 이 제안을 논의했지만 합의는 이루지 못했다.
남반부에서의 정치투쟁, 특히 좌익세력에 대한 박해가 회담 에 영향을 끼쳤다. 이 회담이 역사적인 것으로 되었더라면 수십 년간 계속된 과정을 단축시켰을 수도 있다. 양측은 화해의 필요 성을 느끼지 않았다. 남한은 내부사회의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 었다. 북한은 나라를 폐허에서 일떠세우고 경제발전에서 남한을 앞서고 있었다.대외조건도 평화적인 협상을 자극하지 않았다.세 계가 군사동맹들로 갈라지고 군사경쟁이 강화되는 시기였다.>.
이 기고문을 가지고 판단하면 당시 김일성과 그 측근들은 한 국 첩보부대에서 정보수집공작 차원에서 제의한 남북비밀접촉에 말려들어 이를 정치회담으로 연결시키려는 환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측의 지도부인 박정희-김종필 라인에서는 이 공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북한 지도부가 과잉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박정희의 좌익전력과 민족주의 성향에 대해서 처음에는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암시 한다. 황태성의 밀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박정희 의장이 1961년8월15일에 민정이양에 관한 일정 을 발표한 이후 한미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8월23일 사뮤엘 버거 주한미국대사는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 게 '박정희 의장을 초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요지의 전문을 보냈다.
<(케네디 대통령에 의한) 방미초청은 군사정권을 인정함으로 써 국내상황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내에서 박 의 장의 권위를 강화시켜줄 것임. 이는 박 의장이 강경파에 대해서 온건한 방향으로 영향을 끼쳐왔음을 감안할때 바람직한 것임.이 는 또 북한, 중공, 소련에 대해서 한미간에 균열이 없음을 과시할 수 있음. 한국의 경제문제와 장기경제개발계획에 대하여 솔 직한 의견교환을 할 기회임. 민정이양의 약속이 철저하게 지켜 져야 하며 합당한 기관에 의해서 헌법과 선거법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우리측의 견해를 최고위 수준에서 전달할 수 있음.한 일간의 국교정상화 문제에 대한 우리쪽의 의견 전달을 위해서도 박정희 의장의 초청이 바람직함.>.
러스크 국무장관은 9월1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박정희 의장을 11월13∼17일 사이 미국으로 초청할 것을 건의했다. 초청형식은 비공식 방문. 케네디 대통령의 승락을 받은 미 국무부는 버거대 사에게 '워싱턴 외부에서의 교통비는 한국 부담. 수행원은 10명 이내로 해줄 것'을 지시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주한미국 대사 버거에게 '정상회담 개최 발표문에서 '비공식'이란 말을 빼달라' 고 했다. 버거 대사는 러스크 장관에게 보고하여 '비공식'이란 단어를 삭제했다.
10월26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인 김재춘 육군방첩부대장 은 4명의 선발대를 데리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정일권 주미대사 와 함께 나온 이수영 주유엔대사는 김재춘에게 '미국측에서는 고급 장성들의 구속사태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 다. 의장 각하의 방미 이전에 해결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정일권 대사는 미국측의 의전에 대해서 설명했다.
'미국측의 대접이 말이 아닙니다. 의장 각하가 워싱턴에 도 착했을 때 공항으로 출영할 사람은 매카나기 국무성 차관보에요.'.
다혈질인 김재춘은 흥분했다.
'일국의 실권자를 영접하는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 모 욕을 당할 것같으면 무엇 때문에 옵니까.' '미국측 이야기로는 자신들도 난처하다는 겁니다. 한국에는 민선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박 의장을 국가원수로 대접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상 대우를 할 수도 없으니 전임 주한 대사를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게 말이 안되는 짓이지요. 권력자를 좀 이름 있는 지명인 사 정도로 대우하겠다니! 본국에서도 펄펄 뛸 겁니다. 의장 각 하의 방미계획은 취소되어야 합니다.'.
김재춘은 국제전화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상의했다. 김종 필 부장은 최고회의에 이 문제를 올렸고 미국측에 대해서 줏대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관념처럼 지니고 다니던 주체세력들은 '의장 방미 보류'란 말까지 꺼냈다. 최고회의는 또 사뮤엘 버거 주한미국대사에게도 공식으로 항의했다. 며칠뒤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김재춘 선발대장에게 미 국무부 한국과장 이 찾아왔다.
'박의장의 방미 보류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김재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다음 가는 실권자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의전절차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여 이곳 분위기를 본국에 보고했을 뿐입니 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는 여기선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미국측에선 정일권 대사를 통해서 의전절차를 수정했 음을 통보해왔다. 존슨 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이 공항에 영접 나가고 의장대 사열을 하며 의장이 백악관에 도착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현관까지 나가서 손님을 맞는다는 것이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