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하의 고민
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였던 당시 28세의 김민하(전 중앙대학교총장· 현 한국 교원단체 총연합회 회장)는 황태성과 이웃해 살았지만 자랄 때 는 이름만 들었을 정도였다. 그의 부친 김원출은 상주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며 황태성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김민하는 김원출씨의10남매 중 막내였다.
해방직후 이념의 혼재는 김원출의 자제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전 쟁을 겪은 뒤엔 김민하의 두 형과 누이 한 분은 월북자가 되어 있었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형님들은 일본에서 살게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막내이면서 장남 역할을 해야 했던 김민하는 수복후 서울로 올라 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중앙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 었다. 1961년 7월25일부터 그는 부평의 경찰 전문학교 내에 설치된 재건국민훈련소에도 강사로 나가 혁명정부의 이념을 전파하고 있었다. 김 민하의 이런 직업적 배경에는 당시 고려대학교교수로 있으면서 최고회 의 고문역할을 하던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 왕학수(부산일보 사장 역임)의 역할이 컸다. 왕교수는 김민하를 친동생처럼 잘 해주며 여러 모로 길을 터주고 있었다.
6·25 이후 황태성은 친지인 김원출의 자제들이 북한에서 자리를 잡 도록돌봐 주면서 자신의 조카딸 임양이 동향인 권모씨와 결혼한 사진을 일본을 통해 전해받고 있었다. 임씨의 남편이 된 권모씨는 김원출의 막내아들 김민하의 처남인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남파직후 황태성은 이런 사정으로 김원출의 막내아들 김민하를 찾게 된 것이다.
최근 기자를 만난 김민하씨는 황태성과 관련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황태성씨는 상주군 청리면에서 출생했지요. 우리 집과는 담 하나 사이 를 두고 살았습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엔 '독립운동가'니 '황 태성선생'이니 하는 소문이 자자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얼굴도 본 적 이 없었습니다. 대구 10·1사건이 나자 박상희라는 이름과 황태성이란 이름이 자주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만 그때부터 '독립운동가'나 '황태성 선생'이란 말은 사라지고 '공산주의자'나 '빨갱이'란 말이 퍼 졌습니다.
1961년 9월1일 그 날, 학교에서 강의를 마칠 무렵이었는데 수위가 달려 오더니 정문에 시골에서 올라 온 어른께서 기 다리신다고 합디다. 그 무렵만 해도 서울서 시간강사를 해도 고향에서는 대학선생 이라며 참 대견하게 생각들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낯 모르는 고향 어른들도 부친과의 인연을 대고 무턱대고 제 집으로 찾아 와 며칠씩 식 객으로 묵곤 했지요.' 그 날도 김민하는 황태성을 부친의 친구로만 알았다. 정문에서 인사를 나누었지만 노인은 '나, 촌에서 올라왔네'라고 만 했다.
김민하의 집은 중앙대학교 부근인 흑석동 산동네(산88의 5번지)의 판자집이었다. 2년 전에 결혼해 두살바기 아들 하나와 임신중인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을 집으로 데리고 간 김민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윗방 하나를 비워 모셨다.
다음날 노인은 김민하를 부르더니 돈을 꺼내면서 심심하다며 라디오 를 하나 사 달라고 했다. 김민하는 그 돈으로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를 하나 사다 드렸다. 노인은 통 말이 없었다. 가끔 서울 구경을 간다 며 횡하니 나갔다 저녁에 들어 오곤 했다. 그렇게 한 사흘 쯤 되었을 때였다. 늦은 밤 어떻게 해서 두 사람이 한 방에 앉게 되었다. 그러자 50대의 노인이 차분하게 자신의 신분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내, 황태성이다.' '예?'.
처음에 김민하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하는 생각뿐이었 다. 그러다가 생각이 났다. '독립운동가 황태성'. 그의 기억에는 이미 역사속의 인물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이 충 격적이었다.
'선생님이 진짜 황태성 그 어른이란 말입니까.' '그래. 내가 바로 그 황태성이다.'.
'그럼 지금까지 어디에 계셨습니까. 고향에는 안계신 것으로 압니다 만….'.
황태성은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그동안 평양에 있었다. 평양에 있다가 며칠 전에 휴전선을 넘어 이리로 왔제.'.
김민하는 별안간 '간첩'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런데 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황태성이 먼저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간첩으로 넘어 온 게 아이다.' '예?' '나는 간첩으로 넘어 온 게 아니라 김일성의 특명을 받아 밀사로 넘 어 온 기다.' '밀사로요?' '그러이.'.
어안이 벙벙해진 김민하에게 황태성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평양에서 내려 왔다니까 자네는 아마도 나를 공산주의자로 볼 는지 모르겠네만, 절대로 안그렇다. 이북에는 별 별 공산주의자들이 많지만 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다. 그러니 혹시 간첩으로 넘어온 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의심을 품지는 말거라.
내가 내려 온 것은 박정희 의장의 통일에 대한 속셈을 알아보기 위 해서다. 박정희 의장께서 어떤 방법으로 통일을 하고자 하는지 좀 속시원히 얘기를 들어 보자 그거다.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을 진전 시켜나갈 수있을 게 아니겠나.'.
잠시 뜸을 들인 황태성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나는 북쪽에서 폐병을 앓다가 폐 하나를 들어 낸 사람이다. 거기서 무역성 부상(차관급)까지 지냈지만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나하고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양쪽에서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서로 의사를 통케 해서 통일 문제를 협의하게 해 보자고 내 이렇게 내려온 것 아이가.'.
황태성의 말투는 어느 사이 감상적으로 변해 있었다.
'자네, 내가 박정희 의장하고 어떻게 해서 잘 통하는 지 아나?'.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와의 관계, 박상희를 조귀분(김종 필총리의 장모)과 중매시켜 준 이야기, 어린 박정희가 자신을 무척 따랐으며 참 똑똑한 아이여서 공부를 썩 잘 했다는 이야기 등을 주섬주섬 꺼냈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