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 휴전선을 넘다
1961년 8월말. 황태성은 세 명의 안내조와 함께 늦장마로 계속해서 비를 뿌리던 서부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남쪽으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경기도 장흥면-의정부를 거쳐 우이동 계곡에서 결별했다.
신사복 차림으로 갈아 입은 중키의 황태성은 깡마른 체구에 광대 뼈와 흰머리가 확연한 영락없는 시골 노인의 모습이었다.
1920년대말 경상북도 김천에서 청년동맹위원으로 사회주의운동에 앞장섰던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와도 친분이 깊었다. 좌 익이념을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삼던 그 시절에도 박상희는 '정열적 이고 의분심이 강했으며 민족주의적'이었던데 반해 황태성은 '냉철 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이었으며 골수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인물' 이었다는 것이 재일거류민단 단장을 지낸 조영주의 교우담이다.
박정희가 구미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셋째형 박상희를 따르고 있을때 박 상희와 단짝이었던 황태성과의 조우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황태성 은 박상희와 어울려 김천과 선산군 일대에서 신간회와 각종 청년회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계속하며 김천유지의 딸 조귀분(김종필총리 의 장모)을 박상희와 결혼하게 다리를 놓기도 했다.
수사기록을 정리하려고 황태성을 옥중에서 면담했던 육군본부 고 등검찰관 양헌(현재 변호사·69)대위에 의하면 황태성은 1920년대에 서울로 올라와 박헌영이 다녔던 경성 제일고보를 다녔다고 한다. 그 는 6·10만세운동에도 관여했고 4학년때는 일본인 교장배척운동에 앞장서다가 퇴학을 당했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때도 퇴학을 당했다고 한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때 참여했던 황태성은 조봉암과 함 께 일제 관헌에게 두번 붙잡혀 형을 살고 나온 뒤 전향을 했다는 것 이다. 그 뒤 해방 직전까지 경상북도 김천 우마차 조합의 서기로 연명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방을 맞은 황태성은 이듬해인 1946년10월1일 '쌀배급제 반대' '박헌영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는 등의 구호를 앞세운 대구폭동을 주동했다. 박상희는 해방직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에서 '건국준비 위원회구미지부' 간판을 내걸고 좌익운동을 하며 신탁통치 반대시위 에도 참가했으나 좌익들이 찬탁으로 돌아서자 침묵하고 말았다.
황 태성이 주동한 대구폭동을 계기로 박상희도 10월3일 구미의 군중들 을 지휘하여 선산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점령하고 '구미 좌익정권'을 세우게된다. 이때만해도 좌익에 비판적이었던 박정희는 박상희와 이 념적 갈등을 겪다가 상경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고 있었다. 박상희는 1946년 10월5일 새벽에 진압경찰관들 의 총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혼란속에서 종적을 감췄던 황태성의 행적은 1961년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구폭동사건 때 황태성은 큰아들 황경옥을 잃 었다. 황경옥의 젖먹이 외동딸 황유경만이 홀로 남겨졌다.
육본 고등검찰관 양헌 대위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있던 황태성 과 수차례의 면담을 통해 그의 과거행적을 소상하게 정리했다. 양헌 변호사는 최근 기자에게 기억을 되살려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대구폭동이 실패하자 서울로 올라와 숨었습니다. 그때 민 주주의 민족전선 상임위원이던 이승엽은 황태성을 나무라면서 빨리 월북하라고 종용했다고 합니다. 황태성은 고향을 버리기 싫어 반대 하자 '당의 명령이오'라고 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옥중에 있는 남 편을 기다리던 누이와 대구에서 경북여고를 다니던 조카딸 임 모,그 리고 대구 의전을 다니던 자신의 둘째 아들(기옥)만을 데리고 월북 했다고 합니다.'.
황태성의 누이는 김천 태생의 중앙고보-보성전문을 나온 임모와 결혼해 딸을 낳았다. 황태성의 매부가 된 임씨도 한국사에 정통한 지식인으로 황태성과 함께 좌익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해방후에도 좌 익활동을 하던중 예비검속으로 구속됐다. 임씨가 수감되어 있던중에 처남 황태성은 누이와 조카딸을 데리고 월북한 것이다. 임씨는 그후 석방되어 좌익 전향자 모임인 보도연맹 김천지부 간사장이 됐다가 6·25때 총살됐다. 다시 양헌 변호사의 증언.
'월북한 황태성은 황해도 해주로 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도기관 지인 황해일보사 총무국장으로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는 겁니다.조 카딸 임양은 김일성 대학에 입학시키고 자신의 아들은 신의주의 모 소비조합장 딸과 혼인시킨 뒤 김일성대학 의학부에 입학시켰다고 합 니다.'.
황태성은 황해일보사에 머물면서 허헌(최고인민회의의장, 김일성 대학 총장 역임·사망)의 딸 허정숙(인민위원회 선전국장, 조평통부 위원장 역임·사망)에게 편지를 냈다고 한다. 이 덕분에 그는 무역 성의 전신인 산업성 지방국장 자리를 받아 평양에 들어갈수 있었다 는 것이다. 황태성과 그의 조카딸은 6·25때 다시 남한으로 내려왔다. 황태성은 서울구경도 할 겸, 고향도 볼 겸해서 자진해서 남하했고, 조카딸 임양은 김일성대학 학생들중 주로 남한출신들만 골라 조 직된 선무공작대로 뽑혀 인민군과 함께 월남했다. 그녀는 고향 상주 에서 낙오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형을 살고 나와 같은 동네에 살던 권모씨와 결혼, 현재까지 생존해있다.
6·25때 서울로 들어 온 황태성은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이던 이 승엽의 강압에 못이겨 다시 북으로 돌아가야 했다. 황태성은 남로당 출신이긴 했지만 박헌영의 노선에 몹시 비판적이었고 이승엽과는 앙숙같았다고 양헌 변호사는 회고한다. 1953년8월 김일성의 남로당계 열 숙청때 박헌영과 이승엽 등은 처형됐지만 황태성은 살아남았다.
그는 무역성 부상(차관)을 지내다가 폐병을 얻어 중국 북경의 인 민병원에서 치료한 뒤 현직에서 은퇴하여 살던중 5·16 쿠데타가 일 어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태성은 얼마 뒤 장도영이 실각하고 박 정희가 전면에 부상하는 것을 확인한 뒤 자진해서 갑산파의 대남연 락부장이던 이효순을 찾아가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박정희야 말로 내가 사숙했던 아이입니다. 날 존경하기까지 했 습니다. 내가 내려가 직접 만나겠소.'.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던 황태성은 양헌 검찰관과의 면담에서 '박정희는 만군 시절에 휴가를 나오기만 하면 나를 찾아오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효순의 허락을 얻은 황태성은 얼마간 침투교육과 밀봉교육을 받은 뒤 휴전선을 넘어 서울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시 발택시를 타고 명동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모 언론사 앞에 내렸다.
김사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황태성은 '김00을 만나면 남북관계를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양헌 검찰관에게도 말했다고 한다.
김00은 자리에 없었다. 일차접선이 어긋나자 황태성은 미리 암기해 둔 동향의 친지 김원출의 아들을 찾아 흑석동의 중앙대학교로 택시를 갈아탔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