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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장의 고민
 박의장의 고민
 
 조카사위 권씨가 '박정희 의장과의 접촉은 위험하다'고 설득해도 황 태성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권씨는 '사생관이 확실한 인물이어서 태 도를 바꾸기 힘들겠다'고 판단하고 그날 오후 2시, 종로의 금란다방으 로 김민하와 함께 나갔다. 먼저 나와 기다리던 세 명의 수사관들에게 김민하가 신분증을 확인했다. 수사관이 꺼내 보여준 신분증은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의 직함과 이름을 타자로 친 뒤 도장을 찍어 만든 것으로 중앙정보부 요원임을 확인하는 증명서였다.
 
 이들은 광교 부근의 중앙정보부 3국으로 자리를 옮긴 뒤 황태성의 소재 를 가르쳐 주고 그간의 일들을 고스란히 털어 놓았다. 김민하와 권씨는 이날 밤 귀가했다.
 
 이날 저녁, 수사관들은 흑석동의 김민하 집으로 차를 몰고 다시 갔 다. 황태성은 자청해서 따라 나섰다. 황태성이 연행된 곳은 서울운동장 맞은편 고양군청자리의 중정 3국 3과 분실로 김모 과장이 그를 기다리 고 있었다. 서울로 잠입한 지 50일만이었다.
 
 황태성은 김과장에게 자신의 월북 전후 행적에 대해서 소상히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파목적이 무엇인가'란 질문에는 한사코 '박 정희 의장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입을 열 수 없다'고 버텼다.
 
 '박의장을 만나 뭘하려고 하시오?' '하여간 박의장을 만나게 해 주시오. 정 어렵다면 김종필 정보부장 이라도 만나게 해 주시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 총리는 황태성 사건과 관련해 이런 증 언을했다.
 
 '황태성이 남한에 들어온 후 처음엔 선산에서 수소문해 자기 조카딸 이사는 데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그 조카딸이 우리 장모한테 자기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하게 된 거죠. 이 소식을 듣고 우리 장모가 놀라서 나한테 소위 신고를 한 겁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고, 그런 사람이 우리 처가 동네 에서 가깝게 살았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 알아보니, 박대통령하고 같이 크고, 나이는 좀 더 많고, 그러나 퍽 가까이 지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해방후 좌경해서 월북한 후에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됐 죠.
 
 난 그 신고를 받자마자 비상을 걸어서 빨리 잡으라고 지시했죠. 결국 황태성이 흑석동 그 조카딸 집에 숨어 있다가 잡혔습니다.
 
 잡아 가지고 신문을 하는데, 이 사람이 자꾸 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나를 만나서 넘어온 취지를 설명하겠다고 하더란 겁니다.자 기는 간첩으로 내려온 게 아니다,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길이 없나 해 서온 사람이니 간첩취급 말라, 자꾸 이러더래요.
 
 그래서 내가 만나는 게 어떠냐 하고 여러가지 생각한 결과, 무슨 계 략을 꾸밀지 모르니까 난 안만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K씨 의 얼굴이언뜻 보면 나와 비슷해서 K씨에게, 당신이 나를 사칭하고 한번 만나보라고 했지요. 황태성이야 내 얼굴을 본 일도 없고, 혹 사진을 봤 을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비슷한 얼굴을 구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렇 게한 거죠. 그래서 K씨가 나를 사칭하고 황태성을 만나보니, 또 같은 얘기를 하더랍니다.
 
 자기는 간첩으로 내려온 게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러 왔으니 최고회의 박의장을 만나게 해 달라, 일이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 한번 만나서 얘기나 하게 해달라, 이러더랍니다.
 
 그때까지 난 박의장께 보고를 안했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 그러지 않아도 그 분이 그런 일로 오해를 사고 있었는데 잘못했다간 심적 피해 가클까봐 걱정스러워 내 손에서 처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황 태성이가 자꾸 만나게 해 달라고 해서 한번은 가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황태성이라고 잘 아십니까?'.
 
 박대통령이 한참 나를 이렇게 보시더니 '그 놈을 어떻게 아나?' 이러 세요. '잡아 놨습니다.' '어떻게 잡았어?' 그래 내가 그동안 얘기를 쭉 했지요.
 
 그랬더니 '그래 뭔 얘기를 해?'하고 물으시기에 '만나 뵙잡니다' 했 더니 이러십디다. '내가 알지만 만날 수 있나. 만나서 되는 일도 아니고. 그래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러나?' '제게 맡기십시오. 조사를 다 한 다음에 자기는 뭐라고 하든지 법이 있으니까, 법에 의해서 법대로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했지요.'.
 
 김과장은 다음날 치안국 소속으로 중정에 파견 나왔던 박모 경감을 불렀다. 김과장은 순진한 인상을 갖고 있던 박경감을 김종필 부장의 대 역으로 삼아 황태성을 조사하기로 했다.
 
 10월22일 오후2시, 황태성은 반도호텔 7층 735호실로 호송되었다. 황 태성은 김종필 정보부장을 만나러 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잠시후 신 사복 차림에 검은 안경을 쓴 사나이가 숱한 수사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반도호텔로 들어섰다. 박경감이었다. 7층 복도에는 방문마다 수사관들 이 서 있다가 가짜 김종필 정보부장이 지나갈 때마다 큰 소리로 경례를 했다. 호위하던한 수사관이 735호실 문을 열었다. 거침없이 방에 들어서 는 박경감-가짜 김종필에게 그의 상관이던 김과장이 벌떡 일어나 90도로 절을 했다. 박경감이 보니 의자에 앉아있던 초로의 신사가 자신을 뚫어 지게 노려보고 있더란 것이다.
 
 '내가 시간이 있었으면 선생이 나에게 하시고 싶다는 말을 다 들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곧 국무회의가 열립니다. 내가 참석해야만 국무 회의가 열릴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김과장에 게 모든 걸 다 말씀하십시오. 김과장은 내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입니다. 기탄없이 아무 말씀이고 다 하십시오.'.
 
 이렇게 말한 박경감은 황태성이 뭐라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고 재빨 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태성은 이때 박경감을 김종필로 인정한 것 같 다. 검은 색 안경을 쓰고 있던 박경감의 얼굴과 이북에서 자료사진을 통 해 보았을 김종필의 얼굴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짜 김종 필이 자리를 뜨자 황태성은 김과장에게 자신이 휴선전을 넘어 서울로 잠 입해 들어 오게 된 목적에 대해 낱낱이 털어 놓았다. 그가 했던 말은 참 고인으로 따라왔던 김민하와 황태성의 조카사위 권씨가 진술했던 것과 차이가 없었다.
 
 수사당국은 황태성을 연행한 지 4일째 되던 10월24일, 김민하와 권씨 를 구속했다. 간첩에게 편의를 제공한 혐의였다. 그 일주일 전 둘째 아 이를 낳고 산후조리하던 아내를 둔 채 구속되어야 했던 김민하는 수사관 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황태성씨 본인이 정보수집을 하지도 않았고, 신분도 밝혔는데 어째 서 간첩입니까. 그리고 제가 신고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파출소에다가 신고를 해야만 신고입니까. 정보부장에게 알리려 했던 것은 신고가 아니고 무어란 말입니까.'.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이들은 그해 11월말까지 취조를 받고 12월초 육군 고등군법회의로 송치되면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구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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