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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하의 일본 인맥
 유태하의 일본 인맥
 
 혁명 전부터 박정희의 경제개발 구상 속에는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일본의 자금을 이용하겠다는 개념이 서 있었다. 당시 박정희는 측근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자금이 필요하다. 미국이 도와준다고 해도 원조를 배로 늘려줄 리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는 한국이 당당 히 받아낼 돈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반일감정이니 굴욕이니 하여 망가 뜨리는 일은 대단한 국가의 손실이다.'.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공업입국을 해야만 한다. 여기엔 미국 의 원조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미국놈들은 시혜원조뿐이다. 그렇다면 자유당때부터 민주당에 이르기까지 지리하게 끌어오던 한일회담을 타결 지어 청구권을 받을 수만 있다면 민주당이 구상했던 경제개발 5개년계 획을 보강, 실천할 수 있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2차대전 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한 핵심이기 도 했다. 5·16 주체세력들은 이승만정부의 대일관에 대해 상당히 비판 적이었다. 이승만은 좌익소탕을 이유로 일제시대의 헌병과 경찰출신들 을 포함한 친일행위를 했던 토착 지주세력들을 대거 포용하면서 국내의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하자 대일외교 현안에 대해서만은 강경 책을 고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18일을 기해 한반도 주변수 역에 해양 주권을 선포했다. 해안에서 평균 60해리에 달하는 이 '평화 선'은 일종의 배타적 경제수역으로서 일본 어민들의 어로가 금지되고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어선들은 나포되기 시작했다.
 
 1951년부터 1953년 사이 3차에 걸쳐 열린 한일회담은 대일 청구권 문제와 어업문제가 주제가 됐다. 그러나 양측의 견해 차이만을 확인하 는 결과만 가져왔다. 특히 제3차 한일회담이 계속되던 1953년 10월15일,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구보전관일랑)가 '일본의 36년간 한국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됐다. 1958년 4월 15일에 재개된 제4차 한일회담에서 비로소 견해차이를 좁히는 데까지 왔으나 한국내 정치 혼란이 가중되자 일본은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4· 19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제5차 한일회담이 열렸지만 회의는 개 최도 안된 채 5·16을 맞았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주일한국 무역대표부에 근무하던 유태하 대 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비자금 500만달러를 숨겨둔 장본인으로 지목됐 다. 민주당 정부는 유태하의 여권을 취소시켰고 대사직에서도 해임시킨 채 소환명령을 발부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받아 주일 한국 대표 부에 참사관으로 부임했던 유태하는 공사를 거쳐 대사로 근무하면서 일 본 정계의 특성을 파악하게 됐다. 최고 통수권자의 결심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는 한국의 대통령 중심제와는 달리 일본의 정계는 내각 중심제로, 정부의 정책 결정과정은 막후 실력자들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는 특성이 있었다.
 
 유대사는 한일협정 타결도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들이 추인하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현장에서 뼈저리게 확인하고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을 대상으로 친한인맥을 구축해 갔다. 그는 한일간 각종 교역의 교섭창구인 주일 대표부를 이용해 돈을 만든 뒤 일본 막후 실력자들과의 교분을 쌓아가던 중 4·19를 맞았고 자신은 외환도피혐의 까지 뒤집어 쓰게 됐다. 민주당 정부로부터 강제소환당할 위기에 처하 자 그는 자신이 구축해 둔 일본 인맥을 활용해 일본 경찰의 호위를 받 으며 은둔하고 있던 중 5·16을 맞았다.
 
 1961년 6월초, 일본에서 불법 입국한 전세호(재일거류민단 학생동 맹위원장)는 경찰에 연행되자마자 '박정희 의장은 문경 교사시절 내 담 임선생님'이라며 면담을 요구했다. 중앙정보부가 막 창설되면서 처음 접수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육사 8기출신 최영택(72) 해외담당 국장은 김종필부장에게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전세 호는 박정희 의장의 혁명정신에 적극 찬동하면서 유태하 대사를 급히 귀국시켜 그가 구축한 일본 정계의 로비망을 활용해야 한일회담이 성공 할것이고, 이를 통해 경제부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최영택은 일본에 가서 전세호의 협조하에 유태하 대사를 귀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최영택은 유태하 대사를 서울 정동호텔에 구금시켰다. 이병희 서울 지부장이 수사를 담당했다. 이병희는 유대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집중 신문했다. 첫째는 이박사의 비자금 500만달러의 행방이었다. 유대사는 '날 믿어 주시오. 비자금은 모략입니다. 한일 교역을 통해 자금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친한인맥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것입니다. 날 데려왔던 최영택 국장을 만나게 해 주시면 모든 것을 다 털어 놓겠습니 다'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중정측은 비자금을 찾을 수만 있다면 각종 공작자금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이박사의 비자금설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두번째로 추궁한 것은 유대사의 일 본내 인맥이었다. 유태하 대사는 최영택 국장에게 '조국의 발전을 위해 서라면 얼마든지 협조하겠다'며 자신이 구축해 온 일본 정계내 막후 실 력자들의 인맥을 전부 설명해 갔다. 그는 '최국장께서 일본에 가시게 되면잘 됐습니다. 여지껏 투자한 것을 잘 활용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최영택은 유태하 대사로부터 받은 진술을 종합해 김종필 부장에게 보고했고 이는 박정희 의장에게도 전달됐다. 최고회의는 막후에 선을 대지 않고서는 한일협정 타결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최고회의 는 최영택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최영택은 1961년 8월1일자로 외무부 주일 참사관으로 발령받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의 공식 직함은 중앙 정보부 일본 지부장 겸 외무부 정무담당 참사관이었다.
 
 유대사와 함께 갔어야 했지만 국내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아 단독으로 가야 했던 최영택은 일본 외무성, 재일 교포 거류민단 중앙본부, 재일 한국경제인 연합회 등을 차례로 방문하며 취임인사를 한 뒤 일본 정계 를 살펴보았다.
 
 자민당은 여덟 개의 파벌로 구성돼 있었다. 이른바 '8개 사단'으로, 각사단의 사단장들이 막후 실력자였다. 최대파벌은 약 8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가장 작은 계파는 10여명의 의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혁명정부는 최영택 참사관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 무역공사 사 장을 역임한 이동환을 주일공사로 파견했다. 함경도 출신인 이동환을 추천한 사람은 이주일부의장과 김동하장군이었다. 최·이 두 사람은 첫 대면에서 '군사정권도 안정돼 가니 중단된 한일회담을 조속히 재개하도록 합시다'라고 다짐했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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