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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의 전화
 기상의 전화
 
 1961년11월16일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을 끝내고 한국 대사관저로 돌아온 박정희의장은 오후엔 수행 기자단 및 워싱턴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 기자회견을 했다. 박 의장은 가장 큰 관심사인 내년도 대한원조규모에 대해서 '일부가 삭감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 미국 지도자들과 만났을 때 5개년 경제개발계획도 있고 한데 그럴 수가 있느 냐고 대들었다. 그들은 실적과 대조해서 가능한 범위내에서 최대한의 원조를 하겠다고 확약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5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사뮤엘 버거 주한 미국대사를 데리고 박정희 의장을 방문했다. 러스크는 원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 면서'내년도 대한 무상원조 액수 9,000만 달러에 대해서 의장의 수행원 들 가운데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만약 한국에 돌아가서 누군가가 이 액수를 가지고 불만을 공개적으로 토로한다면 양국 관계에 악영향을 끼 치게 될 것이다'고 당부 겸 경고를 했다. 러스크는 또 '본인은 여러 외 국지도자들을 상대할 기회가 있었지만 의장처럼 많은 성과를 거두고 귀 국하는 분은 처음이다'고 추켜올렸다.
 
 박정희 의장은 '9,000만 달러를 가지고 우리 두 나라의 친밀한 관계 를 잴 수는 없다. 액수 문제는 서로 잊어버리자'라고 했다. 러스크가 떠나자 박 의장은 오후 6시부터 대사관저를 찾아온 교포, 유학생, 외교 관들을 위한 리셉션을 베풀었다. 다음날(17일) 10시 박 의장 일행은 러 스크장관의 환송을 받으면서 워싱턴 공항을 출발,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의 라구아디아 공항에 도착하니 로버트 F 와그너 시장과 이수영 유엔 주재 한국대사와 전 유엔대사이자 유엔한국대표단 고문인 임병직이 영 접나와 있었다. 박 의장 일행은 미국측이 빠듯하게 잡아놓은 시간표 때 문에 숙소로갈 시간도 없이 바로 오찬 장소인 세인트 레지스 호텔로 향 했다. 오찬을 마친 박 의장 일행은 즉시 워돌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달 려가 한국전쟁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밴플리트 장군이 주최한 다과회에 참석해야 했다.
 
 박정희 의장 일행이 숙소인 카라일 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넘어서였다. 박 의장 일행은 숙소에서 여장을 제대로 풀 시간도 없이 또 서둘러 나와 오후 5시15분부터 권위 있는 연구단체인 미국 외교협회 (카운슬온 포린 어페어)가 주최한 강연회에 가서 연설해야 했다. 박 의 장은 한 시간 동안 연설했는데 한상국 중령이 동시통역을 했다. 이연설 에서 박 의장은 '우리는 다음 정부 형태로서 대통령중심제에다가 의석 수가 100∼120인 단원제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박 의장은 저녁 7시엔 인터내셔널 하우스에 가서 500여명의 교포와 유학생들에게 훈시를 하였다. 그리고 이수영 대사 관저로 가 모처럼 홀 가분한 기분으로 한식을 즐겼다. 연일의 강행군으로 피로가 쌓인 박정 희 의장은 수행의사 지홍창박사가 지어준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다.
 
 다음날(11월18일) 오전에 박 의장은 유엔 주재 한국대표부를 시찰하 도록 되어 있던 당초 계획을 취소하고 쉴려고 했는데 밀려오는 손님들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투자에 흥미를 느끼는 미국 실업인들과 외자유치활동을 벌이기 위해 미국에 온 한국 기업인들이 박 의장을 만나야겠다고 하니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정오에 박 의장은 워돌 프아스토리아 호텔 37층에 숙소를 정해놓고 있던 맥아더 원수를 예방했 다. 82세의 노병은 해군들이 입는 청바지 색깔의 양복을 입고 박 의장 일행을 맞았다. 맥아더 원수는 박 의장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우리는 전우다'라며 사진기자들을 향해 모양을 냈다. 박 의장은 한 시간 동안 맥아더 원수와 환담을 했다.
 
 카라일 호텔로 돌아온 박 의장은 수행원들과 함께 점심을 든 뒤 좀 쉬었다가 오후 5시30분 한미재단에서, 오후 8시 아시아협회에서 연설을 했다. 카라일 호텔로 돌아온 박 의장은 이날밤은 수면제를 먹지 않고 밤11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2시에 잠이 든 전속부관 조상호(체육부 장관 역임)중령 방에 전화가 걸려왔다. 박 의장이 부르는 것이었다. 조 중령은 잠옷바람으로 뛰어갔다. 박정희는 세면준비를 하면서 '일곱 시 가 다 되었는데 무엇들 하고 있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시계를 들여 다보니 새벽2시30분.
 
 그제서야 박정희는 '아, 내가 시계를 거꾸로 읽었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11월19일 오전 박 의장 일행은 미국 정부에서 내어준 수송기 C-121A 기를 타고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엔진이 네 개 달린 이 수송기의 뒷부분에 있는 라운지에서 박정희는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얻 어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수행원들을 불러 묻 기도했다. 기수쪽에서는 미국인 경호원과 미국공보원(USIS)직원이 포커 를 치고 있었다. 요사이는 6시간이 걸리는 미국횡단이지만 당시엔 12시 간이 걸렸다.
 
 박정희와 만주군관 동기생인 이한림 장군은 5·16혁명 때는 제1군 사령관으로서 박정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다가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잡혀온 사람이었다. 그는 석 달 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8월 에 풀려났다. 혁명정부는 미군과 협조하여 군에서 거세된 고위 장성들 을 미국 유학형식으로 추방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미8군사령관 멜로이 대장의 주선으로 로스엔젤레스 근교에 있는 산타 바바라의 캘리포니어 대학에 가게 되었다. 옥중생활중 신장병을 얻은 이한림은 세계에서 건 강에 가장 좋은 기후라는 산타바바라를 택한 것이다. 아파트를 빌어 자 취생활을 하던 이한림은 옥중에서 얻은 신병으로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 고 시력도 크게 떨어졌지만 공부에 전념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했 다. 밤중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분하고 원통한 생각을 달래는 일도 자주 있었다. 11월19일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정일권주미 대사였다.
 
 '지금 박정희 의장을 모시고 워싱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 소. 박 의장께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장군을 만나뵙자고 합니다.'.
 
 이한림은 그 순간 잊으려 했던 분노가 치솟는 것을 진정시켜야 했다.
 
 '박정희와는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이 장군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내 체면을 보아서도 꼭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박 의장을 만나주시오.' '정 장군 미안합니다. 내가 박정희를 만나서 뭘 하겠소. 대단히 죄송하지만 만날 수 없습니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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