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경제재건계획
정소영, 김성범 백용찬 등 세 사람이 실무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국가 재건 최고회의 청사가 태평로에서 퇴계로의 원호처 건물로 잠시 옮겼을 때였다. 뒤에 대통령 경제수석, 농림부 장관이 되는 정소영의 회고--.
'우리는 최고회의 건물 안에 있던 큰 방 하나를 사용하게 되었습니 다. 문 앞에는 '대외비' '관계자외 출입엄금'이란 글을 크게 써 붙여 두었고, 기관단총을 든 헌병이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실무 작업반들은 50 여명이 되었지만 총괄적인 작업은 이 방에서 우리 세 사람이 시작했습니 다.'.
이들 세 사람이 작업하던 방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종합경제기획위원 회'란 긴 이름이 붙여졌다. 정소영 박사는 곰곰히 '경제개발 계획'이란 단어부터 생각해 보았다. 세계 최초로 개발 정책을 5개년 단위로 수립 시행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생산수단을 정부가 완전히 소유한 경 우여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발계획을 세우는 것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정소영과 김, 백 세 사람은 우선 과거 정부의 개발정책 자료들을 참 조하기 위해 각 부처의 자료들을 수집했다.
정부에는 당시 두 종류의 경제개발 계획서가 있었다. 하나는 자유당 판으로 1959년 12월31일 부흥부(부흥부:5·16직후 건설부로 개칭)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의 요약'과 '단기4292 년도 가격기준에 의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으로, 발표된 지 반년도 안 되어 4·19를 맞아 무산됐다.
다른 하나는 민주당 시절인 1961년 5월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시안)'. 이것은 자유당판 경제개발 계획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새로 작성한 민주당판 경제개발 계획서 시 안이었다.
오위영 무임소국무위원은 이 시안을 바탕으로 5·16군사혁명이 일어 나기 4일전인 5월12일 오후4시부터 장면총리를 방문한 뒤 약 한 시간 반 동안 정부가 1962년부터 시행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협의했다. 조선일 보는 다음 날 1면을 통해 '민주당 내각-경제 5개년 계획 윤곽 판명 / 일 본의 재산권배상이 아니면 미·영·독 등 차관 의거 / 우선 석탄 연산 2 천만톤 목표'란 제목으로 그 내용을 보도했다. 5월14일자 조선일보 사설 은'민주당 정부의 5개년 경제계획론은 연목구어격'이란 제목으로 비판했 다. 정소영의 회고--.
'흔히 혁명정부가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모방했다고 하 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들 계획을 검토는 했지만 이용가치가 없어 새 계획을 짰던 겁니다.'.
이 밖에도 이들이 참고한 자료들로는 한국은행의 장기종합경제개발계 획,최고회의 기획위원회의 장기개발계획 등이었다. 5월 중순부터 약 2주 동안 세 사람은 골방에 갇혀 기본전략판단을 내리는 데 골몰했다. 우선 균형 성장정책을 취할 것인가, 불균형 성장정책을 취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재원을 산업분야별로 고루 분배하는 균형성장정책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데는 쉬 합의가 이루어졌다. 정소영은 이렇 게 정리했다고 한다.
'거지 옷 꿰매듯 해서는 안됩니다. 자본회전속도가 빠르고, 작게 투 자해서 빨리 이윤을 낼 수 있도록 자본계수가 작은 분야를 먼저 공략해 야 합니다. 교육에 투자하면 20년 뒤에나 효과를 봅니다. 농업에 투자하 면 종자개량이다, 수리사업이다 해서 최소한 10년은 걸립니다. 공업에 투자하면 공장짓고 생산하는 데 5년이면 충분합니다. 빨리 부를 늘리려 면 1차산업과 3차 산업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2차산업에 우선 투입하는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 2차 산업에서 부를 늘려 1,3차 산업에 투입하 는 불균형 성장정책으로 결정합시다.'.
성장전략이 결정되자 성장률과 투자율을 산정했다. 기준연도인 61년 의 1인당 GNP는 83달러, 국내저축률은 3.9%, 투자율 13.1%, 수출 4천87 만8천 달러, 수입 3억1천 6백만 달러라는 참담한 경제규모였다. 민주당 의계획은 연 5%의 성장을 목표로 했으나 이들은 연 7.1%로 책정했다. 사 회는 경제개발에의 기대가 팽배해 있었고 박정희 소장이 이들 세 사람에 게 심어준 의지와 신념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용가능한 자금 중 투자자금에 활용되는 비율인 '총가용자원에 대한 투자비율'은 21%, 총 소득 중 저축을 뺀 '소비율'은 79%, 국내저축율은 7.2% 등 목표수치를 구체화 해 갔다. 이 계획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부의 역할을 한층 강조한 부분이었다.
'생산수단을 정부가 장악하고 계획경제를 하던 공산주의와 달리 우리 는 정부가 주도하되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살리는 정부주도 형태의 시장 경제체제를 만들어 본 겁니다. 일종의 혼합경제체제였지요. 2차 산업의 자본형성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비약적으로 높이 책정했습니다.
종전의 비효율적인 투자의 원인을, 투자재원의 배분과 관리를 전적으로 민간인 에게 의탁했다는 점과 가격기구의 매개기능을 자유방임 형태로 놓아 둔 것에서 찾았습니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해 낼 수 없는 나라가 무조건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경제를 흉내내니 악순환만 계속됐던 겁니다. 우리는 보고서를 통해 이런 민간주도의 경제운영을 비판하면서 국가주도의 경제운영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작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갈 무렵 서울 상대에서 강의하던 박희범 (뒤에 문교부 차관 역임)교수도 참여했다. 7월 중순 확정된 안의 공식명 칭은 '종합경제재건계획(안)'이었다. 네 사람은 7월20일경 최고회의 전 체회의에서 보고회를 갖게 됐다. 박정희 의장을 위시해 각 부처 간부급 요원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정소영 박사가 차트를 넘겨 가며 보고·설명 을 했다. 박희범 교수는 경제 용어를 설명했다.
'…불균형성장정책을 통해 우리가 강구해야 할 전술적 목표는 다음 두 가지가 되겠습니다. 첫째, 2차 산업을 제일 먼저 육성하되 수출주도 형으로 합니다. 방식은 모방성장 정책을 통해 고도성장을 목표로합니다.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물건을 빨리 모방해 가격을 낮게 책정함으로써 경 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조립방식으로 가는 겁니다. 라디오를 생산하더라도 수백 가지 기초자재를 우리가 다 만들면서 수출할 수는 없 습니다. 시간은 많으니 우선 부품을 수입한 뒤 조립해서 수출하는 방식 을 택합니다. 처음에는 부가가치가 작게 발생하더라도 고용효과가 크고, 수출량을 늘일 수 있습니다. 이윤이 축척되면 단계적으로 국산화 비율을 늘리고 그러면 언젠가는 순수 국산 라디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정소영 박사가 브리핑을 하면서 보니 박정희 의장은 열심히 받아 적 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장내가 갑자기 조 용해졌다. 그때 박의장이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뒤돌아서면서 박수를 힘차게 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선도에 따라 우레와 같은갈채가 쏟아졌다. 완성된 '최고회의 종합경제재건계획'은 경제기획원으로 이관되어 '5개년 종합경제계획안'과 '제1차 경제개발 5개 년계획' 등을 수립하는 데 기초가 됐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