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개혁 발상
다음날 천병규 재무장관은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서 어제 유원식 최 고위원과 나눈 이야기를 보고한 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회고록 '천마초원에 놀다').
'통화개혁은 군사혁명보다도 더 가공할 파급효과를 전체 국민들에게 줄 것이니 쉽게 생각해선 안됩니다'.
'통화개혁은 이미 기정사실이오. 박희범교수에게 화폐개혁에 관한 연구를 하도록 이미 지시를 해두었소. 내년 3월말에 단행할 계획이오.'.
천병규는 한국은행 창립 이래 도쿄 지점장, 오사카 지점장,홍콩 지 점장으로만 근무하면서 해외를 떠돈다고 1950년9월의 긴급통화조치와 1953년2월15일에 있었던 통화개혁을 경험하지 못했다.
'저는 통화개혁을 체험해 본 적도 없고 그것에 대한 지식은 기껏해 야 학교에서 배운 정도입니다. 자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은 미국측에도 통보해놓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박 의장은 '미국측에 알리면 그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천병규 장관은 '그렇다고 해도 한국은행 총재, 경제기 획원장, 최고회의 재정경제분과위원장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는 '그러면 보안이 안된다'고 반대했다. 박 의장은 자신의 경제고문인 박희범 서울상대 교수의 안이 완성되면 그때 가서 다시 의 논해보자면서 '천 장관도 연구를 해보시오'라고 했다. 천병규가 뒤에 알아보니 통화개혁 발상의 주인공은 유원식이었다.
유원식은 5개년 경제개발계획안이 발표된 7월 하순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박정희 의장 에게 통화개혁의 발상을 전달했다고 한다. 내자 동원의 필요성과 함께 새정부가 출범했으니 새 돈을 쓰도록 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야기에 박 의장은 '한번 해봅시다'라고 너무 쉽게 승락해버렸고 그때부터 통화개 혁의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 박 의장은 상공위원이던 유원식을 재경위원으로 옮겨주고 이 통화개혁 준비작업을 극비리에 추진하도록 했다.
비슷한 시기에 송요찬내각수반에게도 이 계획이 알려졌다. 이 시점 에서 통화개혁 계획을 알고있었던 이는 박 의장, 송 수반, 천 장관,유 원식 위원, 그리고 박희범 교수 등 5명이었다. 김종필 정보부장도 모 르고 있었다.
문제는 새 화폐를 어디에서 찍느냐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찍으면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높고 일본서 인쇄하면 편리하지만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이 역시 안심할 수가 없다. 미국에서 찍으면 박 의장이 걱 정하는대로 미국측에 알려질테니 안될 일이었다. 이래서 유럽에서 인 쇄할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천병규 장관은 빈으로 가서 제16차 IMF총 회에 참석한 뒤 서독으로들어갔다. 인쇄기를 구입하는 척하면서 새 지 폐를 인쇄할 공장을 찾아보았으나 통화개혁의 예정일인 1962년3월까지 지폐인쇄를 끝낼 만한 곳이 없었다. 천 장관이 귀국하고 나서인 10월 중순최고회의 의장실에서 통화개혁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이 비밀을 알고있는 다섯 사람, 즉 박 의장·송요찬 수반·유원식 최고위원·천 병규장관, 그리고 박희범서울 상대 교수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 희범 교수는 그 동안 연구했던 통화개혁안을 보고했다. 천병규 장관이 들어보니 도저히 실행이 불가능한 조잡하고 쓸모가 없는 안이라는 판 단이 섰다고 한다. 예컨대 화폐 교환을 은행이 아닌 동회에서 하도록 구상하는 등 현실성이 없었다. 박희범 교수가 물러간 뒤 네 사람은 '박 교수 안으로는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박 교수에게는 '통화개 혁은안하기로 했다'고 알려줌으로써 그를 통화개혁 팀에서 탈락시키기 로 했다. 이렇게 하여 통화개혁 계획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천재무 장관이 실무준비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 천병규의 머리에 떠오른 인물이 김정렴(뒤에 대통령 비서실장 역임)이었다. 김정렴은 한국은행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1953년2월15일 에 단행되었던 통화개혁에 실무자로 참여한 사람이었다. 그 뒤 그는 재무부에 파견되어 이재국장으로 있던중 4·19를 맞았다. 민주당 정부 시절엔 한은으로 돌아와 있다가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받 았다. 까다로운 여권수속과 자녀들의 전학문제를 해결하여 어렵게 뉴 욕에 부임했다가 석 달만에 5·16을 만났다. 혁명으로 불어닥친 인사 숙정태풍에 휩쓸린 김정렴은 뉴욕사무소장직에서 해임당한 뒤 귀국명 령을 받았다. 자유당과 민주당 시절 요직을 두루 거쳤다는 것이 그에 게 불이익으로 작용한 것이다. 한은으로 복귀한 그는 '인사부 소속 참 사'란 직함을 가지고 아무 보직도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천병규 재무장관은 귀국 인사차 들린 김정렴에게 '정부에서 같이 일 해보자'고 했으나 그는 펄쩍 뛰면서 다시는 공직을 맡지 않겠다고 하 는 것이었다. 천 장관은 어떻게 하든지 김정렴을 통화개혁에 참여시켜 야겠는데 그런 제의를 했다가 거절당하면 기밀만 누설되니 절대로 물 러설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강제로 그런 일에 끌어들이자니 인정상 못할 짓이라 고민을 많이 했다. 천 장관은 유원식 준장을 찾아가 의논 했다.
'통화개혁을 실무적으로 성공시키려면 이 사람을 꼭 잡아야 합니다. 통화개혁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유능한 인재이므로 혁명정부에서 기용 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싫다고 하니 나로서는 어떻게 할수 가 없습니다'.
유원식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문제 없습니다. 이름과 주소만 가르쳐주세요.'.
며칠 뒤 유원식은 천 장관에게 연락을 해왔다.
'김정렴씨를 모셔다놓았으니 만나려면 만나보십시오.'.
김정렴은 중앙정보부 구내의 한 사무실에 있었다. 유원식은 그에게 통화개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경제개발에 대해서 연구를 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천병규 장관도 시치미를 떼고 김정렴을 격려했지만 속으로는 '사람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인쇄소를 결정할 때'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회고록 '천마초원에 놀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