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怪商 아이젠버그의 등장
 괴상 아이젠버그의 등장
 
 제1차 경제개발계획상의 1차연도인 1962년의 남한 인구는 약 2,500만. 당시의 인구증가율은 연 2.9%나 되었다. 1차5개년 개발계획이 끝나는 해인 1966년의 인구는 약 2,920만명으로 예상 되었다. 5년간 인구가 420만명이나 증가되어서는 경제성장을 지 속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더구나 당시 실업률은 24%나 되었다. 혁명정부는 대잇기와 피붙이의식이 강한 나라에서 가족 계획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문제는 투자재원이었다. 1차 5개년 계획기간중 투자할 액수 는 3조2,145억환인데 48.8%가 전기, 교통, 통신, 주택 등에 투 입되고 광공업에 34%, 농림·수산업에 17.2%가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투자재원의 약 4분의1은 외자로 조달하기로 했다. 혁명 정부는 줄고만 있는 미국의 대한원조에만 매달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독자적으로 외채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자유당 정부는 1958년에 호남비료의 나주공장을 짓기로 하고 서독의 루르기사와 건설계약을 맺었다. 착공은 했지만 국내재원 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혁명정부는 김 재규 준장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하고 자금을 과감히 방출하 여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니 서독 정부와 기업인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김재규를 사장으로 추천한 이는 정래혁 상 공부장관이었다. 정래혁은 3사단장 이종찬 장군 밑에서 참모장 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때 부관참모가 김재규였다. 정래혁 은 호남비료 사장이 된 김재규가 순진하고 사심없이 일을 잘했 다고 기억한다.
 
 서독과 혁명정부를 끈끈하게 맺어준 사람은 유태인 사울 아 이젠버그였다.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 그 뒤안길에 등장하는 흥미있는 인물 들 가운데 한사람인 아이젠버그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 하다.
 
 몇년전 이스라엘에서 사망한 아이젠버그는 독일출생의 유태 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일본에서 돈벌이에 성공한 거상이었다.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한국에 지사를 두고 장사를 시작했다. 주로 수입품의 중계를 통해서 돈 을 벌었다. 1959년에 도입된 서독 지멘스사의 전화교환기도 아 이젠버그가 중계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 한국뿐 아니라 중남미, 동남아, 중동 등지에서도 많은 사업에 관여했다.
 
 그는 주로 자금이 달리는 개도국에 진출, 정부-기업-은행-건설회사 등을 서로 연결시켜주면서 자금도 마련해주고 사업도 성사시키는 '일괄 거래의 조정자'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이스라엘의 2중 국적소지자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프란체스카 여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 아이젠버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은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성장 정책을 밀고 나갈 때였다. 아이젠버그는 주로 서독차관을 많이 끌어와서 우리나라의 기간산업 건설에 연결시켜주고 많은 커 미션 등 이문을 남겼다. 그가 '일괄거래' 방식으로 엮어준 사업 목록은 한국기간산업총람으로 보일 정도이다.
 
 영월화력 2호기, 부산화력 3-4호기, 영남화력 1-2호기, 인천 화전, 월성 원전 3호기, 동해화력 1-2-3호기, 쌍용시멘트, 고려 시멘트, 동양시멘트, 한일시멘트, 일신제강, 유니온 셀로판, 피 아트 자동차, 석탄공사의 채탄시설 현대화, 중앙선 전철화, 포 항제철 증설 등등.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줄어들 때라 박정희 정권은 아이젠버그가 주선하는 차관이 이율이 매우 높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젠버그가 처음으로 서독 차관 도입을 중계한 것은 1961년 가을이었다.
 
 아이젠버그는 정래혁 상공부 장관이 서독의 관료들과 기업인 들을 만날 수 있도록 손을 써놓은 뒤 정 장관과 함께 차관도입 교섭차 1961년 11월13일 독일로 출발했다. 아이젠버그는 정래혁 장관을 안내하여 크루프, 지멘스,하노버 조선소 등 서독의 유수한 회사들을 돌아보게 했다. 에르하르트 경제담당 부수상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 아래 차관과 교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서독정부의 장기차관과 민간투자를 합쳐 3,750만 달러 상당 의 마르크화를 1962년에 한국정부에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것은 혁명정부 최초의 공공차관 도입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서 독을 새로운 차관도입선으로 뚫는 것을 보고 경계심을 갖게 되 었다. 한국으로선 미국측에 대하여 '당신네들만 있는 것이 아니 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돈을 꿔올 수 있다'는 과시를 한 셈 이 되었다. 박정희 의장은 서독대사를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어 주면서 미국의 방해로 서독과 더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지 못하 게 된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달했다고 한다.
 
 경제개발계획의 성패를 좌우할 재원 조달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박정희 의장은 1961년 여름에 엄청난 결심을 하게 된다.
 
 1961년 9월초였다. 천병규 재무장관은 빈에서 열리는 IMF연 차총회에 참석하러 가기 며칠 전 최고회의 재경분과위원 유원식 준장으로부터 식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삼선교 부근 에 있는 유원식의 집을 찾아가서 담소를 하는데 유 준장이 이런 말을 꺼냈다.
 
 '경제개발을 하는 데는 외자동원도 어렵지만 내자가 더 문제 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화교들이 숨겨가지고 있는 돈이 천억 환은 된다고 합디다. 그 돈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숨통이 트일 터인데…'.
 
 천병규는 그때 통화량이 2,830억환인데 아무리 화교들이 현 금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들 그렇게나 될까 하고 반신반의했다.
 
 유원식은 자꾸 통화개혁쪽으로 화제를 끌고가는 것이었다.경 제개발에 투자할 내자를 동원하고 돈의 소재를 파악하여 부의 편제를 시정하는 목적으로서 통화개혁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데 천병규는 너무 엄청난 발상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천장 관은 '이건 유 위원 생각이오, 아니면 박 의장 생각이오?'라고 물었다. '박 의장께서도 알고 있으니 내일 한번 만나보시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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