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
IBRD(세계은행)도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에 난색을 표명했다.어빙 프리 드만 총재,피터 카길 극동국장, 베니 굿맨 부국장은 '외자도입이 안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세금을 어떻게 거둘 생각이냐' '남의 돈만으로 개발 계획이 되겠느냐'는 등 구체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그들은 '허무맹랑한 계획으로는 외자를 끌어들일 수 없다'고 충고하면서 '성장률을 낮추라' 는 조건을 내세웠다.
송정범은 여기서 말문이 막혀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우리는 개발계획을 해마다 수정 보완할 겁니다. 그러니 지원을 요청합 니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한다. 결국 제2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의 입안때부터 IBRD측이 적극 개입한다는 조건하에 외자지원의 언질을 받아 냈다. 박정희 의장이 귀국할 때 IBRD측은 간부를 동행시켜 한국에 파견했다. 파견된IBRD측 간부는 외자도입체제를 고치고 모든 프로젝트 건설 을 정부주도로 할 것을 권고하면서 외자도입시 정부가 보증하고 수출산 업 육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도록 제안했다.
IBRD측의 권고를 받아들인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둔 채 부분적인 수정을 했다.
1962년 1월1일 경향신문은 이틀에 걸쳐 '신춘 경제 좌담회'란 제목의 대담기사를 실었다. 재계 대표로 이병철삼성물산 사장이, 학계를 대표해서는 육지수 서울대 경제학 교수가, 정부에서는 송정범 경제기획원 부원장이 대담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병철은 '더 큰 계획을 세워야 합 니다. 경제개발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큽니다. 외자는 기업가들이 앞장 서서 도입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육지수 교수는 정부의 농공병진정책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농업과 공 업을 비교할 때 공업이 이윤도가 높으므로 어떤 나라든지 공업을 하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의 현 실정으로는 60%를 점하는 대다수 농민들이 잘 살게 되어야 국내시장도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장기 경제계획 의 첫 단계에서는 농업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송부원장은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위주니 중점이니 하는 말을 하시는데 우리가 항구적으로 농업을 위 주로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공업화를 지향하는 조건의 하나로서 농업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공업화 에 있습니다.'.
1962년 1월5일, 혁명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 발 표했다. 정소영 등이 만든 최고회의판 종합경제재건계획을 토대로 경제 기획원이 5개월여 작업끝에 탄생시킨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청사진이었다. 송정범은 이렇게 회고했다.
'계획은 만들었지만 막상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안났습 니다. 정말 탁상공론으로 끝나는 게 아닌가 내심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의 서문에서 박정희 의장은 개발계획의 전략을 이렇게 설명했다.
<진정한 민주정신에 입각한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경제 체제의 원칙하에 정부의 강력한 계획성이 가미되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민족적 숙원인 승공통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계획서는 기본 전략으로서 다섯 가지를 꼽았다.
<가. 민간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기업의 원칙을 토대로 하 되 기간 부문에 대하여는 정부가 간여하는 '지도받는 자본주의체제'로 한다.
나. 정부가 직접적인 정책수단을 보유하는 공적부문에 계획의 중점을 둔다.
다. 한국경제의 궁극적인 진로는 공업화에 있다. 그 준비단계에서 전 력,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농업생산력 증대, 기간산업과 사회간 접자본의 확충, 고용증대와 국토개발, 수출증대, 기술진흥에 주력한다.
라. 국내자원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외자도입에 중점을 둔다.
마. 국방비는 불가피한 자연증액만을 인정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시절에 부흥부에서 '5개년 경제개발계획안' 을 만들어 보고하자 '5개년 계획이라니? 그건 소련 공산당들이나 할 일 이 아닌가'라고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관료들은 노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2년을 깎아서 '3개년 계획안'으로 바꾸기도 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식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끔 뜯어고쳐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경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 장에 개입, 주도하는 식으로 하고 정치도 국가가 국민들을 교도하는 식 으로해야 한다고 해서 '교도 민주주의'란 말을 쓰기도 했다. '교도 민 주주의'(뒤에 나오는 한국적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나 '지도받는 자본주 의'는 동전의 양닢이다.
박정희는 자주적인 근대화의 걸음마도 떼지 않는 한국, 더구나 북한 과 대결하고 있는 한국은 서구식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감당할 토양이 못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국가 엘리트가 장악한 정부가 나서서 국 가근대화를 통해 시장과 민주가 기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발전단계와 남북대치상황에 입각하여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고 일부 지식인이 아닌 대다수 국민의 입장에 서서 무엇이 국익 이고 선인가의 시비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 박정희식 실사구시, 또는 박 정희식 주체성의 핵심이었다.
박정희는 한번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영미 등 일류 국가의 제도를 교과서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야당, 지식인, 학생들의 눈에는 독재를 위한 자기 합리화로 비쳐지기도 했다.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국방비를 최소한으로 억제한다는 것을 원칙으 로 삼은 것도 주목할 점이다. 그런 사실상의 군비동결결정이 군인혁명 가 그룹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외국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것이 다. 박정희는 1960년대를 경제제1주의로 밀고나갔고 김일성은 군사제 1주의로 밀고나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박정희는 60년대에 구축한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하여 자주국방정책을 추진한다. 김일성은 과중한 군사비 부담으로 60년대에 이미 경제가 망가지고 나서야 1970년대에 경 제건설을 시도했으나 기초체력이 떨어진 뒤라 효과가 없었다. 1970년대 중반에 가면 연간 국방비 지출에서도 남한이 북한을 앞지르게 된다. 오늘날 남북한의 격차를 가져온 씨앗이 1962년에 뿌려진 것이다. 즉, 이 해부터 시작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과 북한에서 시작된 4대 군사노선이 그것이다.
북한은 1962년 가을에 벌어졌던 쿠바 미사일 사건 때 소련이 핵전쟁을 각오한 미국의 압력에굴복하여 쿠바에 배치했던 미사일과 핵 탄두를 철거하는 것을 보고는 자주군사노선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962년 남북한은 각각 다른길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보이던 그 차이가 해가 바뀔수록 커지게 되는 것이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