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정책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으로서 혁명정부 초기의 경제발전 전략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1963년초 한 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중농정책이 아닌 중공정책을 추진해야 할 이유를 예언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1인당 국민소득을 앞으로 178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 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필리핀, 터키와 비슷한 수준이고 정부의 계획보다는 많다. 앞으로 10년간 21∼23억 달 러의 외자도입이 성공하면 3년만 지나도 이미 건설한 공장에서 는 수익이 나오게 된다. 그 수익을 매년 2억 달러로 본다면 이 자금을 민간사업에 재투자할 경우 10년간 15∼20억 달러에 해당하는 공장건설자금을 새로 확보하는 셈이 된다.
총40억 달러 의 투자로써 4백만 달러 규모의 공장 천 개를 지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투자총액의 약 70%에 해당하는 28억 달러의 연간 생산증가가 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1인당 1백 달러의 국민소득 증가는 무난히 달성될 것이다. 이들 공장이 평균 500명씩 고용 한다면 고용증가는 50만, 부양가족을 계산하면 2백50만명,하청 중소기업과 유통단계에서의 고용을 계산하면 약500만명의 고용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숫자만큼 농촌인구를 공업에 흡수 할 수 있게 된다.
즉, 1,500만 농민의 3분의 1을 공업부문으로 흡수하면 1인당 경지면적 420평은 630평으로 늘어날 것이고 공 업화에 따라 비료와 농기구를 싸게 공급할수 있을 것이다. 공 장에 부과하는 세금도 늘어나 공무원의 봉급도 배로 늘릴 수 있어 부정부패도 일소할 수 있게 되고 사회도 명랑하고 건전하 게 될 것이다. 전국민이 빈곤을 추방하여야만 반공체제를 확립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178달러선을 넘게 되는 것은 이 병철의 희망보다도 3년이 빠른 1969년이었다.
이병철과 박정희는 출신배경이나 성격, 그리고 취향이 대조 적이었다. 이병철은 부농출신에 성격은 깔끔하고 엘리트주의에 기울어 있었다. 두사람은 경제발전을 통한 부국강병과 반공태 세 확립이란 대강에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거나 갖게 된다.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엘리트와 이병철로 대표되는 기업인 들이 서로 호흡이 맞았던 이유에 대해서 김주인 당시 한국경제 인연합회 사무국장은 '군인들의 조바심과 기업인들의 명예심이 맞아떨어진 때문이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측은 국민들에게 보 여줄 공장건설 등 가시적인 실적을 원했고 기업인들은 '부정축 재자'란 불명예를 벗어던지기 위해서 하루빨리 기간산업을 건 설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박정희는 뒷날 외무장관이 되는 이동원(당시 대통 령권한대행 비서실장)에게 이런 푸념을 했다고 한다.
'이 실장, 아무래도 내가 쿠데타를 잘못한 것 같소. (정권 을 잡고나서야) 우리나라가 도둑맞은 초가집꼴이란 것을 알았 소. 해방 후 벌써 15년이나 흘렀소. 그간 뭐 제대로 해놓은 게 있소. 다들 썩어빠진 정치인 때문이오. 정권욕에 눈멀고 입만 살아 벙긋하는 그 못난 놈들 때문이오. 내 무식하잖소. 그래서 유명하다는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에게 물어봤소. 어떻게 해야 우리도 잘 살수 있냐고. 그들이 그럽디다. 우리나라는 기본적 으로 농업국가란 것이오. 자원도, 기술도 없는…. 결국 경제발 전의 조건을 못갖추었다는 거였소.이실장, 정말 우리나라는 가망이 없는 것이오?'.
박정희의 이런 답답한 심경이 아래로 전해질 때는 더 증폭 되었을 것이다. 이병철의 회고에 의하면 혁명정부는 기업인들 이 약속한 공장을 빨리 짓지 않는다고 '별도 조치를 취하겠다' 고 위협까지 하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한 기업인이 볏짚 펄프 공장을 짓겠다고 했는데 진척이 잘 되지않자 혁명정부에서 '가 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이 기업인이 겁에 질려 한국경제인협회 이병철 회장을 다급하게 찾아왔다. 이 기업인은 '자금과 기술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공장을 안 짓는다고 야단이다'고 호소했다. 이병철은 최고회의로 들어가서 차근차근하게 설명하여 납득을 시켜 이 기업인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입삼 전 전경련 부회장은 '기업인들이 외자도입을 통해 서 공장을 건설키로 하면서도 세워질 공장이 자기 것이라고 생 각한 이는 없었다'고 기억한다. 부정축재자로 낙인된 기업인들 가운데는 물욕보다는 후손들에게 그런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 해서 더 절박한 기분으로 외자도입, 기간산업 공장 건설에 뛰 어다녔다는 것이다. 김입삼은 '사람이란 묘한 것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리면 재물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모양이다'고 했다.
이정림 대한양회 사장은 연안이씨 가문출신이었다. 그의 6대조는 사화에 휘말려 고생을 했는데 유언이 '벼슬길은 단념 하고 가게를 꾸미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정림은 개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당이 기업체마다 강제로 배당한 정치헌금을 냈다고 해서 '부정축재 자'로 몰려 '조상을 욕되게 했다'면서 울분을 참지못하고 눈물 을 짓기도 했다.
이병철은 기업인들이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을 리드하게 되었 다는 자신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민간외자유치교섭단을 결성 했다. 1961년 11월 초순에 이병철을 단장으로 하는 미주교섭단 과 이정림을 단장으로하는 구주지역교섭단이 출국했다. 이병철 은 미국의 기업인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20억 달러가 필요 하다. 그 가운데 13억 달러는 외자로 조달해야 한다'고 설명했 다. 미국 기업인들은 '임해지역에 특별공업 지역을 설치해야 투자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고 조언했다.
비료공장 건설을 숙원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이병철과 정유공장건설을 추진 해왔던 극동해운의 남궁련은 이때 이미 울산을 공업지구로 점 찍어 놓고 있었다. 미국 기업인들은 이병철 일행을 인도하여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 공업지구를 구경하도록 했다. 대한양회 사장 이정림이 이끄는 구미지역교섭단은 서독에서 크루프, 지 멘스 등 대기업을 상대로 차관교섭을 벌였다. 그 뒤 여섯달 이 내에 금성사, 한일시멘트, 쌍용시멘트 등이 2천5백만 달러 규 모의 서독차관을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본격적인 외자도입 시 대가 열린 것이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