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  조선일보  |  독립신문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라이트뉴스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기사 확대  기사 축소  

혁명가와 기업인
 혁명가와 기업인
 
 1962년 초 박정희의 경제노선에는 자력갱생과 대외개방이란 엇갈린 방향성이 공존하고 있었다. 민족자본을 동원하기 위한 통화개혁의 비밀 추진, 민족자본에 의한 국영 정유공장 건설의 추진이 대표적인 자력갱생 노선의 표현이라면 외자도입 추진과 공업화 및 수출산업 육성은 개방정책의 표현이었다. 1962년에 큰 소동을 겪으면서 박정희는 자 력갱생 노선을 버리고 대외개방적 공업화-수출입국 정책을 선택하게 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통화개혁은 실패하고 민족자본에 의한 정유 공장건설계획은 메이저(걸프)를 불러들이는 방향으로 수정된다. 이런 박정희의 궤도수정에 따라 유원식 최고위원과 박희범 서울대 교수로 대표되는 급진적성향의 인물들이 퇴장한다. 반면에 이병철 같은 기업 인들과 박충훈-김정렴 같은 실무관료들이 박정희 의장을 중심으로 한 혁명주체들의 실사구시 노선과 호흡을 함께 하게 된다. 5·16이후 약 1년에 걸쳐 이루어진 박정희 의장의 시행착오와 방황은 이 혁명가가 경제를 배워간 과정이기도 했다.
 
 박정희 만큼 경제와 먼 성격의 인물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는 군 생활중 이재엔 관심이 없었다. 돈을 돌처럼 보았는지 될수록 멀리하려 했다. 장군으로 진급한 다음에도 돈에 대한 결벽증을 버리지 않아 아 내 육영수는 생계를 겨우 꾸려갈 정도였다. 박정희는 그러나 돈엔 무관심했지만 국정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안목이 있었다.
 
 1951년 박정희 대령이 육군 정보학교장으로서 대구 삼덕동 셋집에서 살고 있을 때 김용태(뒤에 공화당 원내총무 역임)는 공 짜로 방 하나를 얻어 쓰고 있었다. 박 대령은 김용태와 함께 소금을 안주삼아 깡술을 마시면서 이런 울분을 토하더라고 한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텐데. 동족상잔의 전쟁을 무모하게 끌고간 다는것은 참으로 비극이야.전쟁을 막으려면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해.특 히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으려면 빈곤을 없애는 길밖에 없어. 빈곤퇴치, 이것이 우리의 당면과제야.'.
 
 박정희는 잘 살아보자는 뜻에서만 경제개발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 전략으로써 공업화와 새마을운동을 추진한 측 면이 강하다. 누천년의 가난을 벗어던진다는 한풀이 의식과 함께 북한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경제건설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 박감이 그를 몰아세웠기 때문에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은 그토록 절박한 기분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혁명 이전에 경제서적은 거의 읽지 않고 주로 역사서적을 많이 읽었다. 인문-사회과학의 종합학문인 역사에 그가 밝았다는 것은 경제정책과 근대화전략을 판단하고 결단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 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정치와 경제에 접근할 때 역사적인 관점, 즉 한국의 역사, 전통, 문화, 민족성, 그리고 현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이런 관점은 사물을 주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판단하게 해주기 때 문에 명분론이나 이념에 사로잡혀 큰 오판을 하는 것을 막아준다.
 
 박정희의 유연한 정신세계와 겸손한 자세, 그리고 사심이 적은 태 도가 그로 하여금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우게 했다. 실천력을 중 시하는 박정희는 이론에 치우치는 학자나 신중한 관료들보다는 무엇인 가를 만들어내는 기업인들과 더 잘 호흡이 맞게 된다. 전경련 상근부 회장을 지낸 적이 있는 김입삼은 1961년 6월 하순에 있었던 박 의장 과 기업인들의 만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한국경제신문 연재 '김립 삼회고록').
 
 <박정희 부의장은 유원식 최고위원을 통해서 김용완 경성방직 사장 (뒤에 전경련 회장), 전택보 천우사 사장, 정인욱 강원산업 사장을 최 고회의로 불렀다.
 
 '경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견을 듣기 위 해서 뵙자고 한 것입니다. 순서 없이 평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씀 해주시지요.'.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였다. 전택보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1947년에 홍콩에 갔을 때 목격한 일입니다. 모택동군에 쫑겨 홍수 처럼 밀려온 피란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물까지 수입해서 마 시는 홍콩에서 수백만의 피란민들이 직장을 갖고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그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바로 '보세가공'을 해서 먹고살고 있더군요. 홍콩에 비교해서 우리 여건은 유리하다고 봅니다.'.
 
 전택보가 실감있게 설명해가도 박정희는 확실한 감을 잡지 못했다 고 한다. '보세가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박정희 는 '미안하지만 내일 또 시간을 낼테니 다시 오셔서 설명해주실 수 있 습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에도 경제강의 같은 기업인들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김용완은 '대학이 너무 많다. 4년제 대학의 반은 기술 전문대학으로 개편하여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 사장은 또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된 기업인들을 풀어주십시오. 기업인이란 개 미처럼 죽을 때까지 일할 운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일할 수 있는 기 업인을 양성하는 데는 20∼30년이 걸립니다'라고 했다.
 
 정인욱 사장은 '우리나라에선 지하 30m 이하의 심층에는 어떤 광물이 있는지 탐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를 탐사하여 실업자에게 일터를 만들어주어야 합 니다'라고 했다. 경제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던 박정희는 이런 충고를 너무나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여 기업인들은 오히려 긴장감을 느낄 정도였다는 것이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기사목록  프린트하기 

조선일보 | 스포츠조선 | 주간조선 | 소년조선 | 여성조선 | NK조선 | IT조선 | 잡지DB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 오피시아 1729호  |  대표자 : 조갑제  |  사업자등록번호 : 101-09-63091
상호 : 조갑제닷컴  |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 김동현  |  전화번호 : 02-722-9411~3  |  팩시밀리 : 02-722-9414 |
    개인정보취급방침

발행인 : 조갑제 | 편집인 : 조갑제 | 등록번호 : 서울아00945 | 등록일 : 2009/08/24 | 국민은행 360101-04-065553(예금주: 조갑제닷컴)
webmaster@chogabj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