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공장 계획안
일부 혁명주체 장교들은 대미자주노선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성향이 경제정책으로 나타날 땐 통화개혁에 의해 민족자본의 동원 시도, 또는 수입대체산업 건설의 형태를 보이곤 했다. 자립경제의 상징 은 정유공장이었다. 우리나라가 전략물질인 석유의 공급을 미국과 미군 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모에 대해서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군인들은 아주 예민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1954년에 이승만대통령은 주한미군과 환-달러 환율문제로 분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환율을 현상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환율인상을 요구하던 미군은 한국측에 대한 석유공급을 중단했다.
우리나라에 대한 석유공급은 민수용을 포함해서 전량을 미군이 맡고 있었다. 약60일간 석유공급이 중단되어 경제·사회가 마비되자 고집센 이승만도 환율인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등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은 1941년 여름 미국이 메이저 석유 회사에게 대일 석유수출 금지령을 내린 것이 일제를 몰아붙 여태평양 전쟁으로 가게 한 요인이 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인도 지나 반도를 침략한 데 대한 보복조치로 석유 금수령을 내린 것이다.그 때 일본은 석유수입의 대부분을 미국계 석유회사에 의존하고 있었다.
일본은 약5천만 배럴의 석유를 비축하고 있었으나 약80%는 해군용이었다. 일본은 비축용 석유가 바닥나기 전에 개전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주된 진공목표도 유전지대인 인도네시아로 잡았던 것이다.
이처럼 석유가 가진 고도의 전략적, 정치적 가치를 체험한 혁명주체 들은 울산공업센터의 상징으로서 정유공장 건설을 부각시켰으며 국내자 본에 의해 설립되는 국영으로 계획하였다. 민족주의적 발상이 물씬 풍 기는 정유공장 건설 계획을 짠 것은 동국대 경제학 교수 유인호(뒤에 중앙대학교수)였다. 30대의 유인호 교수는 5·16직후 최고회의 기획위 원회산하의 중화학공업 소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처 음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운영되는 기업들의 경영실태를 조사하는 일을 했다.
'이 조사에서 한심한 꼴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느 비료공장에 갔더니 빗자루와 사다리까지 미제를 수입하여 쓰더군요. 그 까닭을 물었더니 원조계약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겁니다. 영등포의 해남초자공장에 갔더니 공장은 2년 동안 문을 닫고 있고 웬 미국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지 않겠어요. 그 노인은 기술고문이고 할머니는 노인의 아내겸 비서라는 거예요. 월급은 얼마나 주느냐고 공장주에게 물었더니 노인에겐 월1천2백 달러, 할머니에겐 월8백 달러가 나간다는 거예요. 이것도 원조계약에 따른 것이랍디다. 부산 영도의 어느 조선소 에도 갔습니다. 한 영감이 미국에서 들여온 17만5천 달러짜리 기계를 쌓아놓고 지키고만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4년 전에 들어온 기계인데 일 부만 도입되고 후속공급이 되지 않아 그렇게 방치하고 있다는 거였습니 다. 일부 기계라도 돌려야 될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런 부분 운전은 금 지되어 있다나요.'.
미국원조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 유인호에게 1961년8월 정 유공장 설립의 기본안을 만들어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유인호는 정유공장만큼은 외자를 쓰지 않고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서 작업에 착수했다. 유인호는 석유공부를 많이 했다. 석유 전문가는 고사하고 석유에 대해서 상식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 때였다. 그는 민주당 때 만든 정유공장 건설계획과 관계부처에 서 제출한 자료들을 참고하여 기본계획안을 만들었다. 그 요지는 이러 했다.
·경영형태: 국영 ·규모: 일산(일산) 3만5,000 배럴 ·자금: 정부 보유외화 1,600만 달러 및 한화 35억 환 ·원유도입(국가): 이란 또는 사우디 아라비아 ·원유수입(회사): 독립계 석유회사 ·원유수송: 그리스 유조선(3만t급) ·국내판매: 코스코 조직이용.
이 안은 민족주의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메이저 석유회사 를 원유공급선에서 배제한 것이라든지 국영으로 운영함으로써 가격결정 에 있어서는 영리만을 내세우지 않도록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유인호는 '그때는 이상하게도 나 혼자에게 정유공장건설계획안을 기초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기름을 정치무기로 사용한 교훈을 되새기면서 소신껏 안을 짤 수 있었다'고 했다. 1961년10월 유인호는 정유공장안을 기획위원회 전체회의에 넘겨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민간 정유공장 설립을 은근히 꿈꾸던 실업인들과 가까운 기획위원들 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국영에 반대했습니다. 저는 석유의 역사에서부 터 이야기를 꺼내 기름은 피와 같다고 역설하고 이 핏줄을 누가 잡느냐 에 따라 경제자립이냐, 예속이냐의 문제가 결정된다고 열을 올렸습니다.'.
유인호의 정유공장 계획안은 최고회의의 승인을 받아 건설 예산이 1962년도 투융자 예산에 반영되었다. 건설 기간은 3년. 첫해에 46억환 (외화 277만 달러 포함)을 투자하도록 했다. 유인호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면서 대학으로 돌아갔다. 1962년1월20일 유인호는 조선일보 1면에 3단으로 난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 '경제기획원 당무자들과 실업인 들이 정유공장 문제로 간담회를 가졌는데 민간인들이 외자를 도입하여 건설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는 내용이었다. 1월29일자 조선일보 에 유인호 교수는 반론을 투고했다. 그는 석유는 '혈액적 존재'라고 표 현한 다음 국영론을 옹호해 갔다.
<···이렇게 중요한 정유공업이 우리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 는 위치에 있다든가 또는 완전히 사기업의 자유재량 아래에 있다면 정 부의 정책은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자본이 아닌 봉급생활자의 저축같은 소액자본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려면 국영으로 발족시 일정기간 뒤에 이들(소액봉급자)에게 불하해야 할 것이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