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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렴의 반론
 김정렴의 반론
 
 1962년에 접어들면서 박정희는 전방위로 바빠지기 시작했 다.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착수, 외자도입추진, 울산공업센 터 건설, 민정이양 준비, 제3공화국 헌법제정 준비, 공화당 사전조직, 한일회담, 월남파병 검토,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밀리에 추진하던 통화개혁 준비작업에 신경을 써야 했다.
 
 1962년에 접어들면서 연도표시가 단기에서 서기로 바뀌고 미터법이 공식 단위로 쓰이게 되었다. 전해의 대풍작의 영향 도 있고 해서 나라의 분위기는 밝았고 사회는 무언가를 향해서 꿈뜰거리고 있었다.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란 빠른 유행가가 이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한미관계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두 나라의 관계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뒤흔들어 위기로 몰아넣게 되는 화폐개혁 준비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계획의 실무자인 천병규 재무장관은 1961년말 영국의 데라루사와 새 화폐인쇄계약을 체결한 뒤 귀국한 뒤, 정보부연구실 요원의 신분으로 통화개혁에 대 한 연구를 하고 있던 김정렴(뒤에 대통령 비서실장 역임)에 게 비로소 진실을 털어놓았다. 한국전쟁중의 통화개혁에 참 여한 적이 있고 재무부 이재국장을 지낸 금융전문가 김정렴은 펄쩍 뛰었다.
 
 '천 선배! 어쩔려고 통화개혁을 하십니까? 이건 안됩니다.'.
 
 김정렴이 반대한다고 통화개혁이 멈추어지기엔 일이 너무 멀리 나가 있었다. 천병규 장관은 1953년 통화개혁 관련 문 서를 한국은행에서 소문내지 않고 빼내오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김정렴은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자료 한 벌을 제가 소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쉽게 해결 되었다. 김씨는 '통화개혁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어차피 해 야 한다면 최선을 다하겠으니 사람을 보충해달라'고 했다.
 
 1953년 통화개혁 때 김정렴은 한국은행 조사부 기획조사 과장이었다. 그때 과장대리로 함께 일했던 배수곤(뒤에 상업 은행장, 은행감독원장 역임)은 한은 조사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천병규 장관은 한은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배 차장 을 정보부에 파견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김, 배 두 사람은 1953년 개혁때 한국은행 발권국장으로서 새 화폐의 수송, 배 정 등의 업무를 맡았던 김병옥(뒤에 조흥은행 전무)을 찾았 다. 그는 한은을 퇴직하여 조흥은행 감사역으로 일하고 있었 다. 그도 불러들였다. 몇달뒤 한은 인사과장 대리 안종기(뒤 에 신한은행 감사 역임)가 합류하여 한 팀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정보부 소유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보안을 위해 옮겨다녔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으로 쓰였던 마포장에 서 일하기도 했다. 네사람은 왕년에 통화개혁에 관계했던 자 신들이 같이 다니면 눈치를 채일 것 같아 차를 탈 때도 시간 차를 두었고 말조심을 한다고 술을 끊기도 했다. 통화개혁의 지휘자인 최고회의 유원식 재경위원이 김정렴을 주미참사관 으로 임명하여 신문에 인사발령이 보도되도록 한 것도 보안을 위한 위장이었다.
 
 김정렴 팀은 산업자금을 동원하기 위한 통화개혁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런 의견을 강력히 상신하되 계획안은 만들어가기로 했다(김정렴 회고록 '한국경제정책 30년사').
 
 1962년 5월17일 장충동 박정희 의장 공관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박 의장을 비롯, 송요찬 내각수반, 유원식 위원, 천 병규 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렴은 계획안을 보고하면서 불가론을 건의했다.
 
 '산업자금의 조달을 위해서는 통화개혁이란 비상수단보다 는 전통적인 재정금융수단을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 다. 꼭 해야 한다면 충분한 사전준비가 필수적입니다.'.
 
 김정렴은 계획안을 보고한 뒤에도 다시 불가론을 개진했 다고 한다. 다른 참석자들은 국가적 견지에서 전통적인 방법 으로는 안된다고 결론내렸다. 박정희 의장 앞에서 김정렴은 미국과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비록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이지만 미국의 원조를 받 고 있는 이상 사전협의를 통해서 원조물자의 사전비축과 사 후의 원활한 도입을 기해야 합니다.'.
 
 모든 참석자들이 그 점에 대해서는 동감했고 통화개혁작 전의 지휘자 유원식 위원도 '염려말고 나한테 맡겨라'고 했 다. 김정렴의 보고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되었다'고 칭찬했 다. 이때만 해도 김정렴은 언제 통화개혁을 하는지 알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고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말하는데 영 국에서 찍은 신화폐가 내일 부산항에 들어오고 6월10일을 기 해서 화폐개혁을 단행한다는 것이었다. 김정렴은 경악했다.
 
 자신의 팀에 발권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신화폐 인쇄에 대해서는 당연히 자신들에게 검토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는 혁명정부가 외국에서 신화폐를 찍고 서 둘러 날짜를 잡아 놓은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날(5월18일) 김종필 정보부장, 이영근 차장, 그리고 김정렴은 용산 미군 비행장으로 가서 쌍발 소형 비행기를 타 고 부산으로 향했다. 1시간 남짓한 비행한 뒤에 수영비행장 에 착륙했다. 그들은 부산항 제2부두로 달렸다. 부두 끝에 있는 창고지역은 통행금지였다. 그곳에는 네덜란드 선적의 큰 화물선 한 척이 접안해 있고 차지철 대위등 공수부대원들 이 대기하고 있었다. 신은행권의 하역은 이영근 차장의 지휘 하에 군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군인들은 사과상자 네 개 를 합쳐놓은 크기의 상자를 내리면서도 속에 새 화폐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기가 들어있다는 말 만 들었기 때문에 조심조심하면서 상자를 옮겨 '소화기' '경 기관총' '중기관총' '곡사포' '통신장비' '화공약품'이라고 표시된 장소에 쌓기 시작했다. 한번은 크레인으로 옮겨지던 상자가 떨어졌다. 김정렴은 신화폐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 고 걱정했으나 상자속에 또 두꺼운 포장지가 들어 있었다.
 
 이틀간의 하역 작업을 끝내고 네덜란드 선박이 출항하게 되었다. 이 배는 일본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김정렴은 이 선원들이 기밀을 누설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화물을 싣고 온 영국 인쇄소 데라루사의 대표는 화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선장, 그리고 사무장이며 명예를 걸고 보안을 책임진다고 약속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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