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
박정희는 '대통령권한대행 비서실장직'에는 뒤에 외무장관으로서 한 일 국교정상화회담을 타결짓게 되는 이동원(현재 국민회의 의원)을 임명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동원 은 국방연구원과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중 5·16혁명 한 달 전에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당시 예비역 해병 장군의 신분으로서 쿠데 타 모의에 가담하고 있던 김동하는 국방연구원에서 공부할 때 이동원의 현실비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를 박 소장에게 소개했다.
서울 무교동 일본음식점 이학에서 초대면한 박정희는 한동안 말도 없이 술만 마시다가 한 마디 했다.
'이 박사, 나 이 박사한테 물어볼 말이 있소. 대답해주시오.'.
이동원이 대답도 하기 전에 박정희가 말했다.
'나 쿠데타 할 거요. 그런데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 같소?'.
이동원은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박정희의 눈에서는 어느 새 불꽃이 일고 있었다. 이동원은 '반미쿠데타만 아니면, 그리고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라고 했다. 쿠데타가 성공한 직후 경향 신문정치부 김경래기자가 와서 '군사혁명을 어떻게 보는가'하고 물었을 때 이동원은 '좀 빠른 느낌입니다. 장면 정권은 출범한 지 9개월밖에 안되는데···'라고 했다.
이런 논평이 보도되자 이동원은 중앙정보부 에 불려가 사흘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박정희는 이 사건 직후 정보 부로부터 보고를 받고 이동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는 이동원을 불 러 '외교관이 되어 날 도와줄 수 없겠소?'하고 부탁했다. 이동원은 장 기간 유학하고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고 사양했다.
박정희는 윤보선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뒤 대통령권한대행을 겸하 게 되자 다시 이동원을 불러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박정희는 권 한대행이 되고나서도 최고회의 사무실과 장충동 공관을 계속해서 썼 다. 이동원 실장이 청와대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각하, 청와대로 들어오십시오. 각하는 대통령권한대행이시고 청와 대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왜 장충동과 미국의 구호금으로 지은 하꼬 방 같은 건물(최고회의)에 미련을 두십니까. 경호도 그렇고 살림도 그 렇지만 무엇보다 체통이 문제입니다.' '난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사람이오. 그러니 청와대로 갈 수는 없 소. 이담에 혹시 내가 민선대통령이 된다면 그때는 들어가겠소.'.
그때 나이 서른여섯이던 이동원은 아홉 살이 많은 박정희가 형님처 럼 느껴졌다고 한다. 공적으로는 철저한 박정희였지만 사적으로는 다정 다감하고 소박했다. 소탈한 것이 지나쳐 술자리에서 가끔은 자신이 국 가원수라는 것을 잊어버린 듯 행동했다. 이동원도 윗사람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을 싫어하고 솔직하게 대하는 사람이라 박정희는 그런 비서실 장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과음하고 온 다음날엔 이동원에게 질책의 전화를 걸어 따지곤 했다. 육 여사가 '비서실장이 바람둥이인데 애 아빠까지 물든다'고 불평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곤 했다. 이동원은 육여사가 박 정희 의장의 술상대까지 귀신 같이 알고 있는 것을 보고는 경호원 중에 누군가가 비밀보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대구사범 동기생들을 주변에 많이 데려다놓았 다. 서정귀(호남정유 사장 역임), 조증출(문화방송 사장역임), 왕학수 (부산일보 사장 역임), 황용주(문화방송 사장 역임), 권상하(대통령 정 무비서관 역임)는 많이 알려진 경우이고 김병희(한양대 문리대학장 역 임)는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고서 박정희를 도운 사람이다. 박정희 의장 은 대구사범 때부터 단짝이던 김병희를 은사 김영기선생 회갑연에서 만 나자마자 학창시절에 했던 장난대로 김병희의 귀를 잡아 비틀고는 식장 까지 끌고갔다.
반도호텔에서 최고회의 주최로 파티가 열렸을 때 당시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이던 김병희도 초청을 받아 갔다. 박 의장이 부하들을 우우 거느리고 들어왔다. 박정희는 김병희를 발견하자 곧장 다가왔다. 참석 자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주목하고 있는데 박정희는 김병희와 악수를 나눈뒤 수행원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나의 대구사범 동기인데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이시다. 한 사람씩 인사드려!…병희야, 나를 좀 도와줘.' '수학을 하는 내가 도울 일이 있나.'.
김교수는 사양했지만 다음 날 김용순(중앙정보부장 역임)최고위원이 찾아와 학생문제 담당 상임 자문위원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하여 김병 희는 최고회의로 나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박정희가 불렀다. 박의장은 김병희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대뜸 한다는 말이 '이 자식아, 한 건물안 에 있으면서 왜 안왔지?'였다. 김병희는 '야, 지금 여기 들어오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어.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시간이 아까워서도 자주 올 수야 없지'라고 했다. 박 의장은 부관을 부르더니 '김병희 교수만은 무 상출입시켜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김병희는 최근에 펴낸 자신의 회 고록에서 친구 박정희를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 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속 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