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사임
이승만 전 대통령의 귀국이 박정희 의장의 엄명으로 좌절되고 있을 무렵 청와대를 지키던 윤보선 대통령도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군에 대한 진압명령을 내려달라는 미군측의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그였다. 그런 윤보 선은 이즈음 박정희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어깨에 대장 계급장을 달아줄 때는 '들러리를 섰다는 씁쓸한 심경을 되씹어야 했다'.
박정희는 미국으로 케네디를 만나러 갈 때와 돌아와서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그의 귀국보고는 어디까지나 형식 적이었지 나에게 진심으로 방미성과를 설명하고 국정을 의논하려는 태 도가 아니었다'고 한다(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 김종필정보부 장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자유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신문을 읽고 알 정도였다.
1962년 3·1절 기념사에서 윤보선 대통령은 '3·1정신을 이어받아 민주주의의 기초를 확립하자'고 했다. 이어서 등단한 박정희는 전혀 다른관점의 연설을 했다.
박정희는 외세와 일제를 불러들인 것은 '이조의 봉건제도와 쇄국정책, 사색당파, 토색질 등 폭정으로 인해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한 것이 다'고 지적하고는 '남을 탓하지 말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그는 이어 서 광복 뒤 자유당, 민주당 정치세력의 암투를 조선조 당쟁에 비교했 다.
'이조 당쟁애사를 방불케 한 정파의 알력과 위정자들의 갈등은 나 라 운명을 암흑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한 바 있습니다.'.
이른바 구정치인들을, 조선조의 정치전통을 이어받은 봉건적 잔재 로보는 박정희의 역사관은 이때부터 그의 연설과 저서에서 틀을 잡기 시작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역사관을 반영한 조 치가 구정치인 3,000여명의 정치활동을 규제한 법의 제정이었다.
3월16일 박정희는 정치활동정화법을 최고회의에서 통과시킨 뒤 박 일경 법제처장을 대통령에게 보냈다. 결재를 받기 위해서였다. 윤보선 은 정치정화법 제정에 반대한다는 뜻을 기자회견을 통해서 밝힌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짜증을 냈다.
'이 법안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내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소?' '알고 있습니다만 최고회의에서 이미 의결된 법안입니다.'.
'내가 반대하는데 어떻게 결재를 할 수 있겠소?' '그것은 각하의 사견입니다. 최고회의의 의결을 거친 이상 각하께 서는 결재를 하셔야 합니다.'.
'결재하지 않으면 그것도 헌법에 위배된다는 말인가?'.
윤보선은 '좀 검토해보아야겠으니 두고 가시오'라고 했다. 그런 뒤 윤세창교수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들의 의견은 한결 같 았다. 대통령이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회의에서 통과된 법률에 서명하 지 않으면 헌법위반이 된다는 것이었다. 윤보선은 정치정화법에 서명 한 뒤 박정희 의장을 불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회고록).
'나는 더 이상 대통령 자리에 머물고싶은 마음이 없어졌소. 이유나 명분을 내세우기보다 홀가분하게 자연인으로 돌아가고싶소.'.
박 의장은 간곡하게 만류했다.
'지금은 그만두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년 여름 민정이양 때까지만이라도 도와주십시오.'.
윤보선은 정치정화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박정희도 지지 않고 당 위성 세 가지를 설명했다. 구정치인들이 아직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벌써 국회의원 출마운동을 하고 있고 국민들은 건망증이 심하여 이들 을 당선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윤보선은 마지막 당부 라고 생각하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폭력과 권력을 이용해서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인류 역사상 길게 유지된 적이 없었소. 반공 또한 마찬가지요. 국민에게 민주주의 의 힘을 길러주어서 그 힘으로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그 들을 설득시키고 감화시켜주기 바라오.'.
다음날(3월22일) 윤보선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사임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도 윤보선은 정치정화법을 비 판했다. 그는 '이런 고언은 5·16군사혁명의 책임이 오직 군사정부에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 덧붙였다. 민주당정권 시절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19개월 열흘만의 퇴임이었다.
3월24일 박정희 의장은 '윤보선 대통령 사임 허가에 관한 담화'를 통해서 최고회의가 윤보선의 의사를 존중하여 사임을 허가하기로 의결 했다고 밝히고 자신이 대통령 권한 대행직을 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전직 대통령 두 사람과 인정상 좋지 않은 인연을 만들었 지만 일본에 살고 있던 영친왕 이은(고종의 세째 아들)에 대해서는 각 별한 관심을 가져주었다. 박정희는 그 전해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 은의 일본인 부인 방자여사가 간곡히 부탁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 했다. 일본에 살고 있던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를 귀국케 하여 국내 에 정착하게 한 데 이어 1962년 2월 5일엔 외무장관에게 특명을 내렸 다.
<목하 체일중인 이은씨 및 금번에 귀국한 덕혜옹주에 대하여 본인 들이 열망하고 있으니 국적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협조 하시와 조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속절차상 다소 애로가 있더라도 특별한 조처로써 취급해주시기 바랍니다.>.
법무부에서는 '귀국한 덕혜옹주의 국적취득은 문제가 없으나 일본에 있는 이은에 대해서는 국내에 주소가 없어 현재의 국적법하에서는 일본국적에서 한국국적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방법이 없고 그렇다고 한 사람을 위한 법령개정도 무리'란 견해를 보였다. 이은이 귀국한 것 은 1년 뒤인 1963년 11월 22일이었다. 그때는 병세가 악화되어 실어증을 보이고 있었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