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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6월21일 미 국무부의 에드워드 라이스 차관보는 정일권 주미 한국 대사를 불러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존중해왔다'면서 '같은 맥락에서 미국도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판단할 권리가 있 다'고 전제한 다음 '만약 (한국을 돕고자 하는) 미국의 노력이 무효 화로 판단된다면 우리는 대한원조정책을 재고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통화개혁을 통해 강제동결시킨 예금을 풀지 않으면 원조를 끊겠 다는 뜻이었다. 정부예산의 반을 미국 원조자금에 의존하고 있던 혁 명정부로서는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김정렴은 모든 봉쇄예금액의 3분의 1을 자유계정으로 풀고 나머지 3분의2는 기한 1년의 정기예금계정으로 전환한다는 특별조치법안을 기안하여 최고회의에 올렸다. 7월13일 이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강제동결된 자금을 기반으로 하여 산업개발공사를 설립, 5개년 경제 개발계획에 매진한다는 통화개혁의 목적은 사라졌고 화폐단위를 '환' 에서 '원'으로 바꾸고 화폐가치를 10분의 1로 바꾸는 데 그치게 되었다.
 
 최고회의는 통화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김동하 재경위원장을 외무국방위원장으로 돌리고 통화개혁의 발상자인 유원식 위원을 사임 시켰다. 그 전에 송요찬내각수반과 천병규 재무장관은 증권파동의 책 임을 지고 물러났었다. 이로써 통화개혁에 관계했던 요인들이 모두 거세된 것이다. 그러나 통화개혁에 반대했던 김정렴은 그 뒤 중용된다.
 
 통화개혁의 실패는 박정희가 집권한 뒤 처음으로 겪은 위기였 다. 많은 위기가 그렇듯 그 속에는 호기가 숨어 있었다. 박정희는 이 실패의 교훈을 오랫동안 기억했기 때문이다. 통화개혁 실패를 통해서 박정희는 내자동원에 의한 민족주의적 경제개발 전략을 단념해야 했 다. 동원할 만한 자본축적이 아예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통화개혁은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민족자본에 의한 기간산업 건설과 수출대체 산업건설 같은 발상은 힘을 잃게 되었다. 이 후부터 외자도입, 보세 가공무역, 수출입국 같은 대외개방 노선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혁명정부가 통화개혁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구정권 시절의 부정축 재자금 등 음성자금을 양성화한다는 것이었다. 도덕적 명분을 앞세운 박정희의 통화개혁 실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금융 실명제를 사정 차원에서 추진하다가 실패한 것과 비슷하다. 경제를 섯불리 도덕적으 로 다룰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는 체험을 한 박정희는 그 뒤로는 경 제에 대해서 매우 실용적인 접근을 하게 된다.
 
 이즈음 박정희 의장은 상공부 차관-장관을 지낸 박충훈과 지방시 찰중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봉건적인 직업관인 사농공상 의식에 대해서 박충훈은 공, 즉 제조업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이에 대해서 박정희는 상공농사를 주장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수출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기업인들을 앞세우고 사로 상징되는 지식인들을 뒤로 밀어버리는 정책을 추진한다. 오랜 문민정치 전통을 가진 우리 나라에서 이것은 이단이었고 학생, 언론인, 학자 등 지식인들의 거센 반발을 예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첫 저서를 펴냈다. 1962년3월1일에 동아출판사에 서 나온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277쪽에 이르는 이 책은 몇 사람 의 학자들이 대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머리말은 박정희의 글이 다. 이 글은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 전략과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문헌이다.
 
 <고달픈 몸이 한밤중 눈을 감고 우리 민족이 걸어온 다난한 역정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짊어진 유산들은 몹시 무겁고 우리의 앞길을 가 로막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더우기 8·15 해방후의 민족수난사는 뼈 아픈 바가 있었다. 과거 17년사는 두 정권의 부패, 부정으로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이는 오늘의 위국을 결과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갱생의 길이 없을까. 이지러진 민족성을 고치고 건전 한 복지 민주국가를 세우는 길은 없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거짓말하지 않고 무사주의, 안일주의의 생활태도를 청산하여 근면한 생활인으 로 '인간혁명'을 기하고 사회개혁 통해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 라'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길이 없을까 하고 여러모로생각해 보았다.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다. 설움과 슬픔과 괴로움에 시달리던 이 민족의 앞길에는 반드시 갱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두드리면 열린다 고 하지 않았는가. 혁명이라는 수술만으로 환자가 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며 병인을 도려내는 것만으로 건강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병이 되오지 않도록 항구적인 방략과 기초공사를 해놓아야 한다.
 
 이 길이 어디 있을까. 꼭 있을 것이다. 이 민족의 걸어온 길과 걸 어 나갈길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에 내키는 대로 몇 줄씩 메모 하여 정리한 것이 이 책으로 되어 나왔다. 서술은 무디고 서투르나 내가 말하고자하는 뜻은 단편적이나마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 리가 당면한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지난날 우리 민족사상의 악유산을 반성하고 이조당쟁사, 일제식민 지 노예근성 등을 깨끗이 청산하여 건전한 국민도를 확립하는 일이 다.인간이 혁명되지 않고는 사회재건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농민들의 기나긴 빈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덴마크와 같은 복지농촌 재건을 위해 있는 힘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는 이해부터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했다. 누적된 빈곤을 하나씩 추방하고 공업화된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자유사회의 존립을 위해서는 국민의 생존권을 옹호할 수 있는 경제자립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 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놓는 것이 바로 승공의 길이다. 북한집단은 무리한 경제발전을 강요 하여 '천리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이는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살하는 악독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도이폐하는 '토끼'보다 꾸준히 밀고 나가는 '거북이의 길'을 택한다.>. ( 계속 ).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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