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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부 내부 균열 : 정보부 권력의 비대화
 정보부 권력의 비대화
 
 1962년에 들어서면서 김종필부장이 지휘하는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의장의 충실한 두뇌와 손발이 되어 국정의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상적인 정보·수사업무 이외에도 1963년 민정이양에 대한 준비작업, 헌법개정, 공화당의 모체인 재건동지회 비밀조직, 워커 힐 건설, 증권투기, 새나라 자동차 건설을 주도하고 있었다.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부 안의 또 다른 정부'였다. 정보부의 이런 독주는 김종필에 대한 반대세력의 도전을 부른다.
 
 김종필과 함께 중앙정보부 창립을 지휘했던 석정선은 5·16쿠데타 의 씨앗이 된 정군운동을 김종필과 함께 주도했던 육사8기 출신의 정 보 장교였다. 김종필과 함께 강제예편당한 그는 5·16거사에는 발을 빼 일부 주체세력으로부터는 '배신자'란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 김종 필은 정보부대, 첩보부대 경험이 많은 그를 데려다가 정보부 창설에 참여시켰다. 정보부에 대한 구상은 5·16전에 이미 김종필의 머리속에 들어 있었다. 김종필은 박정희의 참모들중 혁명이 성공한 뒤 권력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 나라를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정리된 구상을 갖고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최고회의, 내각, 경제기획원, 국민운동본부, 정보부를 5대 핵심 기관으로 상정했다. 정보부의 역할은 혁명과업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을때 이를 조정, 통제, 사정하는 일이었다. 정보부는 처음 4국 3실로 출발했다. 총무국(1국), 해외정보국(2국), 수사국(3국), 교육 발전국(5국) 그리고 통신실, 감찰실 및 비서실. 정보부를 창설한 육 사8기출신 정보장교는 김종필(부장), 서정순(서정순·기획운영 차장), 이영근(행정관리 차장), 강창진(총무국장), 석정선(해외정보국장-뒤 에 정보차장보), 고제훈(수사국장), 최영택(교육발전국장-뒤에 주일 대표부참사관)등이었다. 이들은 수사에는 경험이 없었다.
 
 석정선은 '우리가 잘 모르는 수사인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문제 인 물들이 정보부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나중에 정보부가 권력남용과 인권탄압으로 원성을 사게 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지요'라고 했다. 정 보부의 수사국은 헌병, 범죄수사대, 방첩대, 경찰에서 뽑아온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석정선은 '우리는 정보, 첩보부대에만 근무하여 수사 인맥을 잘 몰랐습니다. 권력의 향방에 촉각이 곤두선 사람들이 여러 명 우리쪽에 합류했습니다'라고 했다. 일제시대의 사상경찰인 특고형 사 출신으로서 광복 후에는 경찰과 특무대에서 국내 정치사건을 다루면서 고문과 조작을 감행했던 수사관들도 더러 묻어왔다.
 
 석정선은 정보부가 '정부안의 또 다른 정부'로 커진 것은 상황이 그렇게 만든 면이 크다고 했다.
 
 '정권은 잡았는데 뭘 어떻게 할 것이냐 했을 때 모두들 김종필만 쳐다보는 입장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시행착오를 겪은 뒤 훌륭한 관리자가 되었습니다만 당시엔 박정희 의장을 포함해서 수많은 주체세력 인사들이 김종필과 정보부에 묻고 답을 구하는 형편이었습니다. 혁명 정부가 사법, 행정, 입법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 3부의 실무자들도 자 신들이 알아서 해야 할 것까지 책임회피를 위해서 정보부에 문의해 오는 판이었죠. 예컨대 1964년 도쿄에서 열릴 올림픽에 대비한 남북한 단일팀 구성문제로 북한과 대화할 경우,정보부에서 전략을 세우고 인선까지 해주어야 움직이는 거예요. 정보부도 전문 인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해서 자연히 기구를 확대하고 인재를 모을 수 밖에 없었습니 다.'.
 
 정보부장 직속으로 정책연구실이란 일종의 싱크 탱크가 생겼다.이를 조직한 사람은 강성원(뒤에 공화당 국회의원)소령이었다. 육군종합학교 출신인 그는 김종필 중령의 보좌관으로 근무했던 경력이 있어 혁명뒤 김종필 부장 직속으로 특명사안을 맡고 있었다.
 
 강성원이 연구실 위원들 23명을 구성했다. 그는 '각 분야에서 최 고란 정평이 나 있는 인물들을 골라 모셔왔다'고 했다. 최규하, 김학렬, 김정렴, 윤천주, 김성희, 김운태,이종극, 정범모, 윤태림, 홍승면 같은 쟁쟁한 인재들이었다.
 
 강성원은 '최규하씨의 경우 자유당 때 외무차관을 지내 민주당 때 는 공민권이 제한된 상태에서 쉬고 있었다. 공직 재취임(재취임을 보 장해주기로 약속하고 모셔왔다'고 했다. 이 연구실의 행정 책임자로는 학구적인 최영두준장이 임명되고 강성원은 사무국장이 되었다. 미 래의 대통령, 부총리, 대통령 비서실장, 장관들을 망라한 이 연구실은 정부 각 부처에서 질문해오는 문제에 대책을 제시해주고 중요정책에 대해서 전문적인 견해를 제공하거나 독자적인 대안을 냈다.
 
 이렇게 되니 4국 중심으로 출발한 정보부 조직도 커지게 되었다.
 
 석정선은 조직을 6개국으로 늘이고 서정순 기획운영차장 산하에 두면 서 반으로 쪼개 3개국은 정보분야를 담당케 했고, 나머지 3개국은 보안분야를 담당토록 했다. 정보차장보는 석정선, 보안차장보는 오탁근 (뒤에 검찰총장)이 맡았다. 이영근 행정관리차장은 공화당 사전조직을 지원하기 위해 중정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같은 기구개편안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석정선은 김종필에게 이런 건의를 했다고 한다.
 
 '이 구조는 혁명기간에 한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군정이 끝날 때 CIA와 FBI처럼 분리하자. 수사분야는 내무부로 보내고 정보분야는 대통령 직속으로 두어 국제적 수준의 정보기관을 만들자.'.
 
 김종필 부장도 이 건의안에 전폭적으로 동조했다고 한다. 석정선은 '김종필이 공화당을 창당하고 정보부를 떠날 때 이 계획대로 정보, 수사 두 분야로 분리시키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땐 이미 그럴 힘을 잃고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이로써 정보부(그 뒤의 안기부, 국가정보 원)는 정보와 수사기능을 함께 가진 권력기관으로 이어져오면서 인권 탄압,정치사찰 등 많은 비난을 받아 대북안보나 해외활동 기능까지도 평가절하되는 딜레머에 처하게 된다.
 
 석정선 정보차장보 산하 정보분야의 3개국중 제1국은 정보수집, 제2국은 정보분석, 제3국은 통신정보의 임무를 담당했다. 오탁근 보안차장보 산하의 보안분야 3개국은 4자를 피해 제5국부터 제7국까지 명칭을 부여하고 각각 기획보안정보, 특수정보활동, 홍보심리전을 담당케했다.
 
 정보부 출범으로 비로소 국가정보기관이 국내외 정보를 체계적으 로 수집, 분석하여 정부의 유관 부처에 제공하는 업무를 시작하게 되 었다. 정보분석은 5명을 한 팀으로 하는 전문팀을 여러 개 만들어 운용했다. 세분된 분야에 관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여 정보철을 만들도록 하니 5∼6개월 뒤에는 요원들이 자기분야에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중동 어느 국가에서 쿠데타가 발생할 것이란 예측이 적중하는 일도 있었다. 정보를 축적하면 사태의 흐름을 일관되게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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