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투기
증권파동의 주역인 윤응상은 5·16직후에도 증권투기의 실패에 따른 고소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용산의 셋집에서 살고 있었다. 1961년 8 월12일 박정희 의장이 2년 뒤 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한다는 발표를 한 직후 그는 정보부 정책연구실 행정관 강성원 소령에게 연락하여 충무로 다방에서 만난다. 그 전에 강성원 소령은 윤씨의 친척을 통해서 윤씨를 만났고 윤씨가 고소당한 사건을 잘 풀어준 인연이 있었다. 윤씨는 김종 필부장의 정치참모인 강 소령에게 대뜸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정권이양을 하는 데는 적어도 백억환 정도의 정 치자금이 들 거요. 돈 있는 사람들은 죄다 부정축재혐의로 묶여 있으니 누가 이권에 관계없이 돈을 내놓겠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증권시장에서 백억환을 만들어줄테니 석달 동안 7억환만 융통해주시오.'.
강성원은 '나는 돈에 대해선 무식하다'면서 다음날 같이 근무하는 정지원 소령을 데리고 나왔다. 정소령은 재건동지회 비밀조직 사무국의 관리부장이 될 사람으로서 재정을 맡게 되어 있었다. 이후 강, 정, 윤 세사람은 증권투자 작전을 세우기 시작한다. 증권거래소와 가까운 서울 명동의 메트로 호텔에 연락처를 정해두고 강성원은 홍회장, 정지원은 박사장으로 위장했다. 넉달 동안의 준비작업 끝에 윤응상은 1962년1월 에 일흥증권과 통일증권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각 5천만환.
윤씨는 정지원을 통해서 자본금을 융통했다고 말했다. 이 돈이 어디 에서 나왔느냐가 문제인데 강성원은 지금 이런 증언을 하고 있다.
'정보부의 돈을 가져다 쓴 것도, 국고를 축낸 것도 아닙니다. 농협 이 갖고 있던 주식을 빌어와 운영자금대용으로 썼습니다. 즉, 당시엔 결제기일에 여유를 두는 선한이란 일종의 선물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이 거래의 보증금으로서 매매대금의 일정비율을 증거금이라 하여 양측이 미리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5억환어치 정도의 농협주식을 이런 증거 금 대용으로 썼고 돈을 번 뒤 주식을 되돌려주었습니다. 물론 재무부와 한국은행에 대해서 제가 정보부의 힘을 빌어 압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 입니다. 증권투자로 한 20억원(200억환)을 벌어 재건동지회 조직에 썼습니다. 그래서 정보부 돈은 일체 쓰지 않았습니다.
이 증권투자 계획 을 김종필부장에게 보고할 때 증권시장의 활성화를 기한다는 것을 명목 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재건동지회(공화당 전신)를 조직하는 데 는 돈을 일체 대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그분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짐작은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종필의 설명은 이와는 다소 다르다(1986년12월호 월간조선-월간조 선 인터뷰).
'공화당을 조직하는 데는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누군 가 '4대의혹사건'(편집자 주-워커힐 건축사건, 증권조작사건, 새나라 자동차 공장 건설 사건, 빠칭코 사건)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거기서 돈 이 흘러들어갔다고 하는데 사실 조직단계의 돈은 내가 관장하고 있던 기관의 자금으로 썼습니다. 내가 이 말을 않고 있으니까 자꾸 협잡질해 서 정당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맹세코 그런 돈이 흘러들어왔는지 어 땠는지 몰라요. 내가 정부 돈으로 정당을 창당한 것도 혁명이란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오.'
'증권사건에 관한 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듣기엔 증권 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바람을 넣어야하겠다는 데서 출발한 거로 압니다. 거기서 돈을 번 사람이 어느 정도 기증을 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김종필은 '돈이 들어온 건 사실이군요?'라고 월간조선 기자가 묻자 '어느정도 관련이 있었죠'라고 시인했다.
정보부 요원으로부터 든든한 자금 및 권력의 뒷받침을 확보한 증권 조작의 귀재 윤응상은 1962년초 자신의 증권회사를 통해서 대증주(대한 증권거래소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액면가 50전이던 대증주는 1환 17전으로 거래되고 있었는데 윤씨의 매입작전으로 곧 2환선을 넘었다.윤씨는 5억5천만주를 사들였을 때 팔아버렸다. 강성원, 정지원은 윤 씨의 첫 솜씨에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윤씨를 지원하기 시 작한다.
당시 증권시장에 상장된 주식은 은행주, 한전주, 미창주(미곡창고주 식회사=대한통운의 전신), 증금주(증권금융주식회사) 등 10여개 종목에 지나지 않았다. 윤응상은 증권시장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 증권시장 활 성화로 떼돈을 버는 전제조건이라고 인식했다. 윤씨가 주목한 것은 금 융조합연합회 청산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한전주 12만8천 주였다. 금융 조합을 모체로 만들어진 농업은행은 5·16혁명 뒤 농협에 합병되었다.
농협이 금융조합청산위원회를 관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 강성원은 농협 부회장 권병호를 찾아갔다. 강소령은 국방부 총무국장 출신인 권병호에 게 말했다.
'증권시장을 육성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니 한전주를 우리가 지정하는 업체에 넘겨주십시오.' '지금 한전주의 값이 맞지 않아서 처분할 때가 아닙니다. 회장이 계 신데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강소령은 일단 물러났다가 농협 회장 오덕준을 찾아갔다. 오덕준은 감독부서인 농림부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강성원은 농림부장관 장경순이 김종필 부장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무부장관의 승인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천병규재 무장관은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증권시장 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앞서 한전주 매각을 승인했는데 윤응상 씨는 재무장관의 허가를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농림부 장관의 허가를 생략했다'고 했다(회고록 '천마초원에 놀다').
정보부의 위세를 업은 윤응상은 이렇게 하여 한전주 12만8천 주를 1 주당 15,813원(액면가 1만 환)에 일흥증권을 통해서 수의계약으로 매입 했다. 당시 시세와 비슷한 가격이었다.
그때 증권시장에 상장된 한전주는 10만여 주에 지나지 않았다. 윤흥상은 그보다 많은 12만8천주를 갖고 있다는 것을 비밀에 붙이고는 상장 된 한전주를 사모으기 시작하여 값을 올리는 작전에 착수했다. 2월말에 한전주의 시세는 2만환대, 나중에는 6만환대로 올랐다. 비로소 증권시장에 대한 시중의 관심이 고조되고 돈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3월중 증권시장의 거래약정대금은 344억환으로서 2월의 4배였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