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주체 두 조각
육군방첩부대장 김재춘(뒤에 중앙정보부장 역임)은 그러나 강성원 그룹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한 내사를 중단하지 않았다. 김재춘에게는 계속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강성원, 정지원을 중심으로 한 7명이 충무로 1가 사보이 호텔 옆 카네기홀 2층에 사무실을 냄. 영입대상 각계 인물 50명 추려내고 종로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건물로 옮김. 건물 2, 3층을 빌어 '동양 화학주식회사'로 위장함.
▲'동양화학주식회사'로 위장한 정보부 정당조직팀은 간부급 인 사 영입 시작. 뉴욕타임즈 서울특파원 서인석, 국민대학 강사 이호 범, 서울문리대 교수 황성모, 대학 강사 이용남,민의원 의장 비서관 신광순, 증권거래소 이사장 대리 박동섭, 연세대 강사 박동윤, 경향 신문 논설위원 소두영, 경향신문 논설위원 장용 영입.
▲1962년3월에는 관리부, 조직부, 조사부 설치. 사무실을 부서별 로 분리. 관리부 사무실은 종로2가 제일전당포 건물 사용. 사무총 장은 이영근(정보부 행정차장), 관리부장 정지원, 조직부 사무실은 제일전당포 건너편 건물에 입주. 조직부장은 강성원. 조사부장은 을 지로2가에 사무실 마련, 서인석부장. 영입인원 100명 육박.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김재춘 육군방첩부대장에게 올라온 이런 보고 가운데는 '낙원동 춘추장을 1년간 전세내어 특수정치 교육 을 하는데 그 방법이 공산당의 남파간첩 밀봉교육과 흡사하다'는 과장된 보고도 있었다. 가족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훈련생끼리도 접촉 할 수 없도록 비둘기집처럼 칸막이를 하고 요강까지 가지고 들어가 방안에서 본다는 식이었다. 이런 교육에는 간첩이 관계하고 있을 것 이라면서 황태성의 이름이 새삼 거론되었다.
춘추장은 자유당 시절의 정치깡패 임화수의 집이었다. 대지 300 평에 양식과 한식을 혼합한 80평의 이 건물은 임화수의 몰락후 한때 고급 요정으로 쓰였다. 여기서 재건동지회 요원 교육을 맡은 사람은 훈련원장 윤천주(문교부 장관 역임)고려대 교수였다. 윤천주는 '황 태성 관련설이니 남파간첩과 같은 밀봉교육 운운'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재건동지회 부산지부 책임자로 뽑혀 춘추장에서 교 육을 받았던 예춘호(뒤에 공화당 사무총장)도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윤천주에 따르면 교육은 5일간의 합숙-단체-강연식이었다고 한 다.
1962년 6월 김재춘은 입수된 정보를 종합하여 박정희 의장에게 보고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치활동을 금지시켜놓고 비밀리에 이런 정 치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각하, 장차 혁명 군이 민정에 참여하여 정권을 잡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김종필 정보부장이 단독으로 하는것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전혀 모르는 소리인데. 철저히 조사해서 보고하시오'.
박정희는 자신이 김종필 부장에게 허가한 재건동지회 비밀조직 을 모른 척하고 김재춘 방첩부대장에겐 '철저조사'지시를 내린 것이 다. 이때만 해도혁명주체세력 안에서 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데 합 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 것은 물론이고, 겉으로는 '양심적이고 참신한 정치인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군에 복귀한다'는 것이 공식적 인 대국민 약속으로 되어 있었다.
김재춘 합동수사본부장 겸 방첩부대장은 군-검-경을 지휘하여 재 건동지회 조직의 활동에 대한 내사를 계속했다. 이를 알게 된 중앙 정보부도 대응책을 취해 양쪽 요원들은 충돌을 빚기도 했다. 김형욱 (뒤에 중앙정보부장 역임) 길재호(뒤에 공화당 사무총장) 등 육사 8 기 최고위원들이 찾아와 '왜 혁명동지끼리 이러느냐'고 대들기도 했다고 한다. 김재춘은 '무슨 소리인가. 혁명공약대로 해야지'하고 원칙론을 앞세웠다. 김재춘은 중앙정보부가 공수단 출신 차지철 대위 (당시 정보부 감찰실 소속)를 팀장으로 하는 특공조를 자신의 주변 에 배치하여 위협을 하고 있는 데 화가 났다.
<나(김재춘)는 박병권국방장관,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김동하 최 고회의 재경분과위원장, 김진위수도방위사령관, 유양수 최고회의 외 무 국방위원장, 유병현장군, 박태준장군 등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김종필의 독주를 개탄하면서 이런 일을 막아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혁명주체가 두 조각이 난 것은 바로 김종필계의 민정참여 추진파와 혁명공약 준수파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이다. 우리는 수시로 김종오총장 관사 에서 만나 그동안 입수된 정보를 토대로 사태를 분석하고 대처 방안을 모색하였다. 중앙정보부 행정관 강성원 등이 재무부와 농협 등에 압력을 가하여 거액의 국고금을 동원, 증권시장을 조작하여 거액을 만들어 그 일부를 재건동지회에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낱낱이 보 고되었다(미발표 회고록)>.
김종필을 핵심으로 하는 육사8기출신 영관장교들은 군 내부에 서 연대장,작전참모 등 실병지휘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고 5·16쿠 데타에서는 두뇌 그룹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박정희란 항성의 가장 가까운 궤도에서 돌고 있는 위성 그룹이었다. 이들처럼 혁명에 주도 적으로 관여하지는 못했지만 계급이 높은 장성그룹은 하급자인 김종 필 그룹의 독주에 기분이 대단히 상해 있었다. 김종필 그룹은 민정 참여 쪽이었고 장성그룹엔 군복귀파가 많았다. 이런 식으로 갈려진 두 세력의 갈등을 폭발 직전으로 몰고가 김종필 부장에게 최초의 위 기를 가져온 것은 증권시장 조작사건이었다.
박정희-김종필 혁명주체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하고 정권을 흔들 어 놓게 되는 1962년 증권조작사건은 윤응상(1997년5월29일 작고)이 란 매우 흥미있는 인물이 주연한 드라마였다. 1916년생인 그는 황해 도 해주출신이었다. 독학으로 일본 중앙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광 복 뒤 서울에 정착한 그는 귀금속상을 했다. 교제 범위가 넓은 그는 6·25전쟁중에 쌍용그룹 창립자 김성곤이 세운 동양통신의 전무, 발 행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군의 실력자이던 원용덕 헌병사 령관, 김창룡 특무부대장과도 친했다. 윤씨는 강원도 속초가 전쟁전 엔 전기가 보급되었는데 수복된 뒤엔 촛불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것 을 보고는 사채를 빌어 미군용 발전기를 구입하여 전기를 공급하고 동해전기㈜를 설립했다.
1955년 그는 동해전기를 이동근 경향여객 사장에게 넘기는 대신 한일증권을 인수함으로써 증권업계에 뛰어들었다. 그 뒤 6년간 윤씨 는 증권시장(당시는 주로 국채를 거래했다)에서 떼돈 벌이와 파산을 거듭하는 파란만장한 생활을 하면서 증권시장의 생리를 체득해갔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