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힐 공사
김종필 정보부장은 워커힐 건설을 석정선 2국장에게 맡겼다. 광 나루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박정희는 송요찬 내각수반, 김종필 부장, 석정선 국장 과 함께 모임을 가진적이 있었는데 즉석에서 이 자리가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 석국장은 김수근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 설 계사 여섯명을 모아서 '우선 외국의 유명한 관광시설을 한번 둘러본 뒤 소신껏 설계해 달라'고 했다.
정보부는 이들에게 해외여행 경비를 대주고 해외 현지에서 한국 공관의 협조를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정보부는 전 조선호텔 지배인 정해직, 교통부 관광국장 김세준을 고문으로 영입하고 2국 1과장 임 병주 중령을 이사장 겸 건설사무소장으로 임명했다. 건설 부지에 들 어 있는 땅의 상당부분은 함경도 재벌 설경동 소유였다. 중앙토지수 용위원회는 토지수용령을 발동했다.
건설예산 56억환은 정부예산 16억환을 비롯, 주택공사, 서울시, 한전 등에서 대출받아 집행하기로 했다. 건설부와 교통부의 기술요 원과 복역수들도 공사에 동원되었다. 막강한 권력기관이 건설을 지 휘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62년 2월25일에 착공, 열 달 만인 12월27일에 완공. 삼환건설의 최종환 사장을 비롯한 미8군 공 사 유경험 업자들이 워커힐 공사에 많이 참여했다. 워커힐 공사의 약 70%를 맡았던 최종환 사장은 현장에 살다시피하면서 공사를 감독 했다. 호텔객실 등에 쓰이는 문 손잡이, 화장실 변기, 가구 등은 모 두 수입했다.
워커힐 건설은 최초의 국제수준 호텔과 공연장을 만드는 공사였 으므로 건설회사들은 이를 통해서 신기술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한 국민속관 건설에서 시도된 철근 콘크리트조 단청 공사는 콘크리트로 써 목재의 질감을 살린 것으로 그 뒤 국내에서 유행하게 된다. 전자 광선 감지에 의한 자동 개폐문, 회전무대, 중앙집중식 냉난방, 에스 컬레이트, 실내 보링장 설치도 최초의 경험이었다.
워커힐 공사는 우리나라 건축계의 중대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관광산업을 도입하게 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1962년6월26일 워커힐을 관리할 회사로서 국제관광공사를 세웠다.관광공사는 워커힐을 비롯하여 대한여행사, 반도-조선호텔도 인수하여 정부주도의 관광산업 진흥에 나섰다. 1963년도의 외국인 관광수입은 151만4천 달러, 이 가운데 주한 유엔군의 공헌도는 약 81%였다.
이 광나루 위락단지에 6·25전쟁 때 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서 작명을 한 것은, 이 공사의 자문역을 맡았던 정해직 의 발상이었다. 다른 빌딩에도 더글라스 맥아더에서 따온 더글라스 관 등 한국과 관련 있는 미군 장성들의 이름을 붙였다. 개막식도 거창했다. 재즈의 대가 루이 암스트롱이 8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고 와서 공연했다.
워커힐 공사 현장소장이었던 정보부 2국1과장 임병주 중령은 주 시공자인 삼환의 최종환 사장에게 '공사를 잘해주신 보답으로 상을 드리고 싶은데 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라고 했다.최 사장은 '건설 업자에게 소원이 있다면 공사를 많이 할 수 있게 되는 것 이외에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소원이라기보다 부탁이 있다면 여권 세 개만 내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이 여권으로 해외공사 수주 상담에 나섰고 삼환은 해외 건설시장 개척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된다.
1963년에 들어와서 김종필이 권력투쟁에 휘말려 외유하면서 그 후임 정보부장으로 임명된 김재춘은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조사,워 커힐 공사 관련자 수명을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정치 자금을 조달했다든지 구조적인 대규모 부정은 발견되지 않았다.
석정선에 따르면 새나라 자동차 공장에 손을 댄 것도 워커힐 건 설처럼 경제 발전이란 의욕이 앞서다 보니까 담당자가 누가 되었든 우선 돈벌이가 될만한 공장을 만들어놓으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추진한 것이라고 한다. 정치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했다든지 하는 주장은 모략이고 일을 하다 보니까 무리가 생겼으며 이는 과욕 과 경험부족 때문이란 설명이다.
1961년10월 대만의 쌍십절 행사에 참석했다가 멜로이 미8군사령 관으로부터 워커힐 건설 제의를 받았던 김종필-석정선은 귀로에 도쿄에 들렸다. 이케다 수상과 만나 한일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김종필과 석정선은 자동차 조립 공장 건설에 대한 탐색을 하기 시작한 다. 정보부 창설 참여자인 최영택 참사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석정선 은 도요타, 닛산 등 자동차공장들을 견학했다. 거류민단 부회장 출 신의 실업인 박노정이 김종필 부장에게 자동차조립공장 건설에 출자 할 뜻을 밝혔다.
당시 우리나라에 국산 자동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5년 서 울 을지로 2가 공터에서 천막을 치고 자동차를 조립하던 시발자동차 (대표 최무성)가 미제지프 '실린더 헤드'만을 국산화하고 차체는 조 립하여 시발자동차로 내놓았다. 4기통 엔진, 트랜스미션, 액슬 등은 미제 중고품을 재생한 것이었다. 시발자동차는 시발택시회사까지 설 립하여 3백 대의 택시를 움직이기도 했다. 자유당 정부가 1956년에 등록 차량을 폐차하지 않고는 증차를 못하도록 하는 운송사업 규제 조치를 취함으로써 시발자동차는 3천 대 생산으로 그쳤다(당시 한국 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약 2만8천대).
1962년1월29일 조선호텔에서 있었던 새나라자동차주식회사 발기 인 창립총회에는 7인의 발기인이 소개되었다. 5·16쿠데타에 자금을 댔던 남상옥(뒤에 타워호텔 회장), 김종필의 형 김종락(당시 한일은 행 전무), 석정선이 발기인에 포함되어 있었다. 10억환의 자본금 가운데 3억환은 박노정이 대고 나머지는 김종락이 전무로 있던 한일은 행에서 융자받기로 했다. 설립 과정에서부터 정치성을 띤 이 회사는 운영에서도 권력의 뒷받침을 많이 받았고, 이것이 이 회사의 단명을 재촉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