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담수비 제막을 마친 뒤 주위의 평야에 야적된 볏단을 바라보더니 수행한 관계자들과 출입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물이 괸 논은 십자형으로 나무를 세우고 벼를 다발로 묶어 그 위에 걸쳐 말리면 습기가 완전히 제거되어서 벼이삭도 잘 건조됩니다.'.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던 공군 1호 헬기에 오른 대통령은 헬기가 이륙준비를 하는 동안 먼 들판을 응시하였다.
기체가 떠오르기 직전에 그는 좀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출입기자 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비공식 행사가 기다리고 있는 당진을 향해 출발한 시각이 11시40분 경이었다.
박 대통령이 삽교천 행사장을 둘러보던 그 시각, 김성진문공부장관은 두 시간째 꼬불거리는 시골길을 달려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김 장관은 하루 전날 도고호텔로 내려와 있었다.
10월26일 오전에 김 장관은 삽교천 행사장을 들르지 않은 채 느지막이 승용차편으로 새로 건립된 KBS 대북방송 중계소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먼저 열리는 행사장에 장관이 참석했다가 대통령을 모시고 자신의 소관 행사장으로 와야 했다. 차지철의 경호실은 대통령과의 과잉접촉을 근절한다는 이유로 이관례를 바꾸어 주무장관은 자신의 행사장에서 대통령을 기다려야 했다.
건평 5백평 남짓한 2층 건물에 안테나 두 개가 솟아오른 자그마한 중계소는 아주 후미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
이 곳은 중앙정보부가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아침에 김재규가 대통령 전용기에 동승할 뜻을 비쳤던 것이다.
김 장관이 중계소에 상주할 직원들과 함께 건물을 먼저 둘러보는 동안 맑은 가을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왕모래 섞인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공군 1호기와 2호기가 중계소 앞뜰에 착륙했다.
2호기에서 내린 경호원들이 경호 배치를 한 후 1호기에서 박 대통령이 내려오고 차지철이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대통령을 모시고 행사장으로 간 김 장관은 대통령과 함께 중계소 현관 앞에서 준공과 개관을 축하하는 테이프를 잘랐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몇가지 시설들을 설명한 뒤 미리 준비해 둔 방으로 안내했다. 시멘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방에 들어선 박 대통령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순간 김 장관은 흠칫 놀랐다.
'그토록 또렷하던 대통령의 날카로운 눈빛이 간데 없었어요. 나를 바라보던 눈빛은 퀭하니 안광이 비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얼굴에는 윤기도 없고 대통령 특유의 긴장감도 없었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 장관, 나 물 한 잔 주어.' 대통령의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작은 행사를 마치고 대통령이 이렇게 기진맥진한 채 물을 청하는 모습에 김성진 장관은 목이 메였다고 했다. 냉수를 받아 든 대통령은 단숨에 꿀꺽꿀꺽 다 들이켰다.
그리고는 어깨의 힘을 쭈욱 빼더니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묵묵히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때까지 박 대통령을 만 9년 동안 모셔왔던 김성진으로서는 처음보는 광경에 애가 탔다. 김 장관은 불안해 졌다.
'어디가 편찮으신가? 아니면 삽교천 행사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언짢은 일이 있었나?' 그렇다고 대통령에게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잠시 후 대통령은 밖으로 나가 예정된 기념식수를 한 뒤 헬리콥터로 향했다. 경호실로부터 헬기에 동승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던 김장관은 대통령의 뒤를 따라 가다가 헬기 문밖에까지 전송하게 되었다.
헬기에 올라탔던 박 대통령은 김 장관을 보더니 '왜 안타나'라고 했다. 행사 후 KBS직원들과 동네 유지들을 모시고 점심을 같이 하기로 되어 있었던 김 장관은 대통령의 채근에 헬기로 뛰어 올랐다.
먼지를 일으키며 1호기가 이륙하고 2호기가 이륙을 시도했으나 엔진고장을 일으켜 주저앉고 말았다. 약 30분 동안 2호기는 KBS중계소 앞뜰에서 긴급 수리를 해야 했다. 먼저 이륙한 1호기는 한 시간 전에 행사를 치렀던 삽교천 방조제부근 상공으로 비행했다.
그동안 대통령은 아무말 없이 무슨 생각에 골몰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 보며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옆에앉은 김 장관이 귀를 기울여도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서 계속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김 장관에게 얼굴을 돌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하면 안되지,' '……?' 말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김 장관이 머뭇거리자 박 대통령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도고호텔 앞마당에 공군 1호기가 착륙한 것은 12시40분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바람-소음이 휘말려 올랐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사슴 사육장에서는 헬기 소리에 놀란 새끼밴 사슴 한 마리가 머리를 벽에 들이 받고 죽었다. 잇단 사고들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도고호텔 2층 회의실에서는 오찬이 있었다.
좌석배치는 몹시 관료적인 인상을 풍겼다. 대통령의 좌석은 맨 끝에 독상 차림으로 마련되어 외딴 섬처럼 느껴지게 되어 있었다. 그 좌우로 길다란 탁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대통령과의 오찬석상에서 비서관들은 예의를 깍뜻하게 차리면서도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데 지혜를 모으곤 했다. 웃음도 있었고 농담과 재담이 넘치곤 했다.
이날 '마지막 오찬석상'에 참석한 김성진 장관은 '딱딱하게 말라버린 가랑잎 같은 존재들만이 대통령을 저 멀리 쳐다보면서 밥술만 뜨는 참으로 한심하고 송구스러운 점심'으로 기억했다.
농담은 대통령이 주로 했다.
대통령은 '김원기 장관이 뜻밖에 준공식장에 나타나 이상하게 생각 했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이 '당진이 제 고향입니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그렇군' 이라고 가볍게 받으면서 농담조로 이런 말도 했다.
'이희일 장관이 청와대에 있을 때는 쌀값을 높게 책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농수산부 장관이 되자 추곡수매가를 올리자고 하는데 입장이 바뀌면 모두 그렇게 되는 건가.'.
박 대통령은 또 7일 전에 있었던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이 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하는 두 길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거야.'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