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와 DJ의 인연
김종필부장의 중앙정보부가 1961년5월부터 1963년1월 사이에 활동한 기록은 명암이 엇갈리지만 그 뒤에 기관차처럼 대한민국호가 달리게 되는 궤도를 깔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의 충실한 머리와 손발이 된 김종필과 정보부는 근대화의 사령탑이 될 권력구조와 경제발전의 기반이 된 여러 제도를 만들고 굳히는 데 있어 서때로는 제안자로서 때로는 감독자로서 활동했다.
미국인들을 어리둥 절하게 만든 정보부의 이런 국정중심적 역할을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 한 요인은 정보부가 군·검·경의 수사권을 독점·통제함으로써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가 상존하는 사회에선 사람 을 잡아넣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관이 힘을 쓰기 마련이다.
권력집중의 필연적인 폐해는 남용과 부패이다. 정보부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정보부 6국장으로서 정치사건들을 많이 수사했던 전재구(뒤에 유정회 국회의원)는 이렇게 말했다.
'계엄령하라는 것을 악용하여 군인들과 정보부 직원들이 사감을 갖거나 또는 누구의 청탁을 받고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일이 있었 습니다. 억울한 사람을 풀어주면 며칠 뒤에 다른 수사기관에 의해서 또 붙들려오기도 했습니다. 정보부 직원만 되면 운전사까지도 수사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누구를 잡아넣어달라는 진정서도 산더 미처럼 들어와 쌓였습니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 사건까지도 진정 대상으로 삼곤했습니다. 구속된 사람들을 조사했더니 한 스무 명은 자 신이무슨 죄로 어느 기관에 의하여 붙들려왔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불러서 석방시킬 때 저는 1만원씩 주면서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보부에 대해서 악감정을 갖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지요.'.
전재구는 이런 실태를 김종필 부장에게 보고했다. 김 부장은 직원들을 집합시켜놓고 '앞으로 중요사건 수사에서 6국장 승인없이는 연행해선 안된다. 정당간부, 기업체 부장급 이상, 언론계 간부 등을 연행할 때는 6국장의 승인을 받으라. 위반하면 엄벌한다'고 경고했다. 이 무렵 곤욕을 치른 이가 김대중(현 대통령) 전 민주당 선전부장이었다. 그는 1961년5월13일에 있었던 강원도 인제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4년 이래 네 번의 선거에서 한번은 등록취소롤 당하고 세번은 낙선한 끝의 감격적인 당선은 그러나 사흘 뒤의 군사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 에 무효가 되고 말았다. 쿠데타 며칠 뒤 김대중은 경찰에 연행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검사가 당 공금의 횡령혐의, 용공혐의에 대해 조사했으나 별다른 사실이 확인되지 않자 석달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1962년5월10일 이희호와 결혼한 직후 또 다시 정보부에 연행 되어 마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김대중은 민주당 정권 때 민선 서울시 장이었던 김상돈, 조직부장 조중서와 함께 반혁명 모의란 혐의로 조사 를 받았지만 혐의가 벗겨져 6월24일에 석방되었다. 이런 정치적 수사의 전결권을 갖고 있던 김종필 정보부장은 특별활동국 전재구 국장에게 '석방하기 전 김대중씨를 불러 풀려나면 혁명과업에 협조하도록 설득하 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전재구 국장은 '만나보니 달변인 김대중씨가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국정에 대한 충고를 많이 했는데 경청할 만한 내용이라 한 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었죠'라고 기억한다.
박정희 의장의 기자들에 대한 시각은 5·16 이후 호전된 경우이다.
군사혁명 전 박정희는 기자들에 대한 경멸감 섞인 적대감을 드러낸 적이 많았다. 이런 시각은 권력을 잡은 뒤 부실 언론기관 및 사이비 기 자 정리로 나타났다. 정권이 안정된 뒤부터는 그러나 언론을 국정의 동 반자로 여기게 된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란 저서에서 '혁명기간에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서구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 에 알맞는 민주주의를 해나가야 한다'면서 그런 민주주의를 '행정적 민 주주의'라고 불렀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유보한 대신 행정이나 정책과 관련해서는 민주적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하여 국민의 정당한 비판과 건의를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환영하며 국민의 여론 앞 에 정부의 업적을 심판받고 정부의 잘못이 시정되어 나가는 방향으로 되어야 할 줄로 안다.>.
요컨대 정권의 정당성이나 정권 담당자에 대한 비판을 제약하되 정 책에 대한 비판은 허용하고 여론을 수렴하는 것을 '행정적 민주주의'라 고 표현한것이다. 야당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건설적 비판을 할 기관은 언론뿐이었다. 계엄령하의 군정이었지만 행정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었 고 특종을 쫓는 기자들과 군정당국자들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962년5월12일 경향신문 김경래최고회의 출입기자는 건군이래 처음 으로 군사고문단이 월남에 파견되었다고 보도했다. 1면 머리에 실린 이 기사는 '군사고문단의 역할은 월남군이 공산게릴라들을 소탕하는 데 조 언을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는 세계언론이 일제히 인용 보도하는 국제적 특종이 되었다. 김경래 기자는 5월10일 오후 최고회의 건물 3층에서 평소 눈인사를 하는 정도의 사이인 최고위원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눈시울이 붉으레했고 자못 긴장된 표정이었다. 김경래는 넘겨짚었다.
'어디 먼데 가시는 길 아닙니까. 혹시 월남 같은 데···.' '월남은 무슨 월남? 난 지리산에 간다오.' '요즘 지리산엔 공비도 없는데 거긴 뭣하러 갑니까.'.
한때 공비토벌작전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 그 최고위원은 '절대 비밀 이야? 김기자가 눈치 챈 모양인데 우리가 출발하기 전에 기사가 나가면 큰일 나'라고 말하곤 쏜살 같이 사라졌다. 김 기자는 그 길로 충정로1 가 월남대사관으로 달려가서 고문단의 파견 사실을 확인한 뒤 기사를 썼다.
5월13일 오전 김 기자는 편집부국장과 함께 수사관들에 의해 최고회의로 연행되었다. 이들이 이후락공보실장에게 이끌려 들어간 곳은 의장실이었다. 김경래는 먼저 박정희 의장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살폈다고 한다. 권총일까, 아니면 회초리 같은 지휘봉일까. 다행히도 박의장은 맨손이었고 표정도 그다지 험상궂지 않았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