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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지성
 권력과 지성
 
 공화당 전신인 재건동지회 요원 포섭대상 명단에 오른 합동통신 외신부 이영희(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대우)기자는 워싱턴 포스트비밀 통신원으로도 일하면서 주로 한국 정치의 개혁을 소재로 하는 기사를 써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합동통신에 같이 근무하다가 동 양통신으로 옮겨간 고명식기자가 찾아와 이기자와 점심을 함께 한 뒤 그를 데리고 들어간 곳이 북창동 부근 재건동지회 조직 사무실이었다. 황성모교수 등 아는 사람 얼굴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기자에게 조 직에 합류할 것을 강권했다. 이 기자가 거절하고 나오려고 하니 누군가가 '이선생께서 우리 이야기를 다 듣고도 들어오시지 않으면 신상에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길 겁니다'라고 위협조로 말했다고 한다.
 
 이영희는 그 뒤로도 끈질긴 입회 요청을 받아 재건동지회 사무실에 나가게 되었다. 뉴욕 타임즈 서울 특파원 서인석(뒤에 공화당 국회의 원)은 그곳에서 조사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서인석은 이영희의 경성 공고 선배였다. 재건동지회 요원들은 이영희에게 '국제관계분석' 임무 를 주었다.
 
 이영희는 공화당 사전조직의 책임자인 육사8기 김동환과는 11사단 에서 장교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이기자는 부탁받은 논문을 써준 뒤 김동환에게 '정치에는 적성이 맞지 않는다'면서 조직을 떠났 다고 한다.
 
 재건동지회 경남사무국장 요원으로서 조직확대에 동분서주하던 예 춘호(뒤에 공화당 사무총장 역임)는 1962년말 조직 점검차 부산에온 김종필 정보부장과 김형욱 최고위원을 만났다. 김부장은 호텔로 예춘 호를 부른 뒤 네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예춘호는 김부장이 이지적이며 냉철하고 나이에 비해 침착하다는 인상을 받았 다. 예춘호는 '5·16혁명의 불가피성은 인정하지만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꼭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사회상에 대해서 역설했다고 한다. 박정희 의장도 연 말에 요원 교육장인 서울 낙원동 춘추장에 들려 한 20분간 보고를 듣 고 갔다.
 
 정치활동이 재개되는 1963년을 앞둔 시점에서 박정희와 김종필은 그들이 혁명공약에서 희망했던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의 육성에 성공한것 같았다. 재건동지회가 확보한 약1천 명의 당기간 요원 들은 능력이나 도덕성 면에서 인재집단이라 할 만했다. 뒤에는 반 박정희로 돌게되는 비판적 지식인들도 이때는 혁명정부의 노선에 동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 현대사에서 주로 갈등관계에 있었던 권력과 지성이 국가, 국민, 국익을 위해서 악수할 수 있는 분위 기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의 광장 역할을 하던 월간잡지 '사상계' 1961년3월호 권두언은 '자유는 정치적 면에서 경제적, 사회 적으로 확대되지 않으면 안되며 그 물질적 기반으로서 힘찬 경제적 건설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정신적 토대로서 국민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함은 물론이다'라고 했다.
 
 발행인 장준하의 기명이 들어 있는 4월호 권두언은 '만일 현국회와 정부가 더 이상 우유부단과 무능, 무계획을 일삼으면 본지도 민족적자 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가차없는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음을 또한 첨부해두는 바이다'라고 했다.
 
 5·16혁명 직후에 나온 6월호 사상계 권두언은 이러한 논조의 연장 선에서 사실상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다. 이 권두언은 '정치생리와 사고 방식에 있어서 자유당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은 파쟁과 이권운동에 몰두하여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그 결과로 사치, 퇴폐, 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이를 틈타서 북한의 공산도당 들은 내부 혼란의 조성을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이글은 '4·19혁명이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 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 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이 권두언은 '혁명정권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1961년7월호 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기명 권두언은 '공산당의 전 체주의적 공포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최대의 사상적 무기는 민주주의 적 자유의 선용에서 구해야 한다'면서 '혁명정부는 민주주의를 새로운 정신과 내용에서 복구시킬 일련의 방안을 준비할 것'을 권고했다.
 
 박정희도 '5·16혁명은 4·19의거의 연장이며 도의와 경제의 재건 은 4·19의거 때 품었던 염원이었다'(4·19의거 2주년 기념사)라고 했 고 '4·19학생 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 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고 썼다('국가와 혁명과 나').
 
 3년 전 오스트렐리아 국립대학에서 '박정희의 자주사상'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형아는 '4·19 이후 사상계 잡지를 매 개로하여 벌어진 한국 지식인들의 토론은 박정희의 통치이념 틀 형성에 큰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지식인들은 한국이 진정한 자주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반공의 미명하에서 정치적 부패가 만연하고 기득권층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했 다.
 
 이런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식인들은 민족주체성에 입각한 '강력한 지도력'과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을 갈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에 반해 박정희는 강력한 지도력과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는 양 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본 점에서 지식인들과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는 '민족 자주성과 경제발전의 확보'라는 목표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서 구식 민주주의가 문화적, 역사적 토양이 다른 한국에는 적합하지 않다' 고 했고 '통일도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결국 지식인들과 박정희 세력은 민족주의적 가치, 즉 자주성 있는 부강한 나라의 건설에는 동의했지만 그 달성 방법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군정기간중엔 상당히 접근한 것으로 보였던 군부와 지식인들의 국가건설에 대한 시각은 1963년에 정치의 계절이 열리면서 멀어지고 만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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