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총리의 고민
한편 김재규를 국방장관실에서 유인하여 체포되도록 했던 조약래 보좌관은 김재규가 차에 실려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장관실로 돌아 와서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노장관은 약간의 부연설명을 덧붙여 장관실에 앉아 있던 최규하 총리 등 몇몇 장관들에게 알렸다.
노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초고에서 그 보고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들 놀라는 듯했지만 대충 짐작하고 있었는지 큰 동요는 없었다'고 썼다. 이때가 밤12시30분쯤이었다. 이 무렵에는 국방부장관실에 있던 상당 수의 장관들이 김재규가 수상하다는 추정에 도달해 있었다는 의미이 다.
육본벙커에서 김재규를 몰아세웠던 김치열 법무장관은 국방부로 올라와서는 장관실에서 또 김부장 옆에 앉게 되었다. 그는 청와대에 서 이미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시해범이라는 사실을 들어 서 알고 있었고 김재규가 권총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김재규가 옆자리에서 '헉, 헉' 숨을 몰아쉬는 것이 들렸다. 김장관 은 불안해져 회의실로 갔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나온 국무위원들은 국방부회의실로 모여 들 었다. 대통령서거를 알고 있었던 총리, 국방, 내무, 정보부장, 비서 실장은 장관실에 있었다. 회의실에 따로 모여 있었던 국무위원들은 무엇 때문에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이들이 대부 분이었다. 이날 국방부에 모인 정부요인들 중에는 대통령이 김재규 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들과 '대통령이 죽기 는 죽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원인을 모르는 이들, 그리고 '대통령이 입원한 정도의 유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들이 섞여 있었다.
지금 쿠데타가 진행중이라고 속으로 추측하면서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이들도 많았다. 시해범인이 김재규 라는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던 최규하 총리는 초조하고 침울한 표정 이었다. 그 김재규와 계엄령선포문제를 의논하면서 그의 생각이 어 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김성진 문공장관은 이렇게 평했다.
[최 총리는 매사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책임감이 있는 공직자로서 정평이 나 있었다. 최 총리는 김재규가 대통령을 어딘가에 감금해놓 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자기의 직위를 방패삼아 정권을 탈취하려고 하지 않는가 내심 의심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국무위원들이 김재규 에게 따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할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며 신중하게 귀추를 지켜보고 있었다(월간조선 1994년 10월호)]
군대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던 지도자였다면 이날의 대처는 달랐 을 것이다.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보고를 받은 즉시 최규하 총리는 자신이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국군통수권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 했어야했다. 경호실을 비상소집하여 자신의 경호를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날 최규하 총리와 김계원 실장은 범인인 김재규가 장 악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육군본부벙커로 가면서도 경호팀을 부르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로 국가원수가 적지로 간 셈이었다. 이는 김계 원 실장이 이재전 경호실차장에게 '대통령의 서거'를 비밀에 붙이고 경호실병력의 동원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국가원수를 그 중요한 시기에 경호없이 8시간이나 방치한 것은 우리나라 경호실 역사에 남을 수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반면에 육군본부벙커와 국방부에서 정보부장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은 권총 을 차고서, 또 김정섭 차장보는 그림자처럼 김재규를 따라 붙어다니 고 있었다. 그래서 김재규에게 공포감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다.
노재현 국방장관조차 '김재규가 그들에게 눈짓만 해도 지하실에 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날 밤 최총리 옆에 막강한 경호병력이 에워싸고 있었다면 그의 태도는 보 다 단호해졌을 것이다. 최총리로서는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을 불러 범인체포를 명령하는 것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보다, 또 계엄선포 사유를 유고로 하느냐, 치안사태로 하느냐, 서거로 하느냐로 지리한 말씨름을 전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였다.
이날 밤의 혼란상황에서 그래도 중심을 잡아가면서 대통령 유고 시의 권력승계를 주도했던 이로서는 신현확 부총리, 김치열 법무장 관, 구자춘 내무장관, 김성진 문공장관이 꼽히고 있다. 특히 신부총 리가 중심적 역할을 했다. 국방장관실에서 신 부총리는 유고의 사유 를 밝혀라고 김재규 부장을 몰아세웠더니 김재규는 '선배님...'이라 부르며 기가 꺾였던 것이다. 최규하 총리에게도 신부총리는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대통령이 유고라고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했 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계엄령을 선포하자는 말입니까'.
이윽고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김 실장이 각하가 안치된 곳을 알터이니 거기로 안내하시오'.
최총리, 신현확 부총리, 노재현 국방장관, 구자춘 내무장관, 김성 진 문공장관은 김계원 실장을 앞세우고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향했다.
이들을 태운 승용차가 중앙청 앞에 도착하니 야간통행금지 때 쳐놓는 바리케이드를 군경합동근무자들이 치워주었다. 시계는 27일로 넘어 와서 오전 1시를 넘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총리 일행은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김성진 장관 은 치료용 침대위에 누워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아니기를 바랐다. 머 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천으로 덮어씌워져 있었다. 모두들 그 앞에서 얼어붙은 사람들처럼 부동자세로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한참 그렇 게 서 있다가 누가시킨 것도 아닌데 서로 약속이나 한듯 고개를 다같 이 숙였다. 김병수 원장이 머리를 덮은 하얀 시트를 걷었다. 대통령 의 얼굴은 깨끗이 씻었기 때문인듯 상처가 보이지 않고 잠든 듯했다. 얼굴은 약간 부어 있을 뿐이었다.
최 총리 일행은 김병원장의 안내로 옆방으로 옮겼다. 김 원장은 엑 스레이 사진 필름을 갖고 와서 총상과 탄도를 설명했다. 노재현 국방 장관은 병원을 나서면서 보안사 이상연 대령에게 박대통령의 시신을 감시하고 있던 유성옥 서영준 두 사람을 연행하라고 지시했다.
총리 일행이 국방부로 돌아와서 국무회의를 열기 전에 장관실에 들렀다.
장관실에는 군 장성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먼저 김종환 합참의 장,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이 물었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으니 지금 우리 국군의 통수권자는 누구입 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성진 장관이 나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 유고시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국군통수권자는 국무총리이 십니다'.
누군가가 헌법을 찾아서 확인해보자고 제의했다. 책장에서 헌법을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가 않았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어서 제목에 '육 법전서'가 아닌 '헌법'이란 단어가 있는 책을 뒤졌기 때문이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