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운명적 인간의 나상
1962년12월27일 박정희 의장은 최고회의 본회의실에서 1년20일만에 처음으로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박의장은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만나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으나 한 기자가 '최고위원들이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하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이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다' 고 하자 버럭 화를 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란 게 뭐요? 그런 엉터리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오.'.
박의장은 자신의 출마에 관해서는 '당명에 따르겠다'고만 말했다.그 는 또 '화폐개혁은 확실히 실패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잘 전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는 '내자동원을 위해 화폐개혁을 하긴 했는데 뚜껑을 열 어보니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그때부터 원상복구시키는 데 애썼습니다. 누군가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최고회의 의장이 받아야지 다른 사람이 받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의장은 이 회견에서 대통령 선거는 1963년4월 초순에, 국회의원 선거는 5월 하순에치를 것 이라고 말했다.
정치의 계절이 1년7개월간의 동면에서 풀려나는 1963년이 밝았다.1월 1일자 신문에 일제히 실린 박정희 의장 회견 기사는 3일 전에 있었던 공동기자회견 내용이었다. 이 회견에서 박정희는 민주주의에 대해 주목 할만한 소신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이상이고 목표라고 생각한다.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가지 가 있을 것이다. 서구식도 있고 자기식도 있으니까 가는 길은 다를 수 가 있다.꼭 이 길이라야 한다는 불변의 길은 없다. 한국은 한국민의 현 실에맞는 방식을 택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건국된 이래 그 민주주의 를 주관적(또는 주체적)으로 해석한 바탕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한국 의 현실에 맞는 한국식 민주주의로 개조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사람 은 박정희가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다. 민주주의를 지고지선한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숭배하던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박정희의 이런 태도는 무엄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무렵 박정희는 자신의 역사관, 혁명관, 국가관, 민주주의관을 담 은 책을 내고싶어했다. 대필자(대필자)로 천거된 사람은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 박상길(뒤에 청와대 대변인, 수협회장 역임)이었다. 1963년 1월중순 박의장은 한남동의 안가로 박상길을 초대하여 '저를 좀도와 주 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박상길은 '번거로운 말이나 완곡한 표현은 전혀 없고 간결, 소박한 딱 한 마디 말'이었다고 기억한다. 얼굴을 쳐다보니 '안광은 바위를 뚫을 듯한데 어딘가 피곤하고 우수가 스쳐가는 비장감 같은 게 엿보였다'고 했다. 그 며칠 후 밤 열시 박의장은 박상길을 의 장공관으로 불러 본론을 털어놓았다.
'혁명인가 뭔가 했는데 국민들도 그렇고, 심지어 다리를 같이 넘은 자들까지도 정확하게 내 심정을 몰라주니 미국놈들도 그렇고···. 접 장인가 교수라는 자들도 무어 알아듣지 못할 소리들만 하고···. 가슴속에 있는 생각을 시원하고 정확하게 털어놓을 방법이 없을까요. 정 치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이놈 말 다르고 저놈 말 다르고 앞으로 그때 그때 요긴한 대목에 의견을 좀 말해주십시오. 혁명이라고 하지만 헤이따이(병대)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도대체 구정치인들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렇게 해서 박상길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란 가제하에 박정희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박상길은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 는 박의장과의 담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무시로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근처의 의장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 상길은 남산 아래 허름한 여관에 방을 잡고 써내려갔다. 2백자 원고지 50장에서 100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공관으로 직행하여 박의장에게 들이밀고 읽어보도록 했다.
바로 이 전후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차 분히 앉아서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난제 등이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의 외의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지금 가난을 벗고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벗지 못하면 언제 또 기회가 있겠습니까'라고 했고 '특권층의 당쟁, 세도가 나라를 말아먹었는데 해방이 되고 민주세상이 되었다는 마당에 또 특권층이 설치니 원···이 나라 백성들은 언제 햇빛을 봅 니까'라고도 하면서 노기 띤 안광에 슬픔이 가득 차 있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박상길은 자신의 회고록 '나와 제3·4공화국'에서 이렇게 묘사 했다.
<이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 없는 나상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 열,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이후 이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분의 철 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하나의 인간으로서 의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중에 '국가와 혁명과 나'란 제목으로 발간된 이 책의 맨 끝장에서 박정희는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다'라고 했다.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본인과 같은, '가난'이란 스승 밑에서 배운 수백만의 동문이 건재하고 있는 이상, 결코 쉴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는 염원인 것이다.>.
박정희는 끝장의 끝에다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란 인사 말을 덧붙였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