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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박정희
 박정희 의장은 1963년2월 초순에 이미 자신의 민정불참 결심 을 김종필에게 털어놓았고 김종필은 뜻을 바꾸도록 설득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주체세력 내분과 야당및 언론의 공격에 직면하여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비판과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군인으로서 그는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다. 최고회의에 출근도 하지 않고 공관에서 골똘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2월 16일 민정당 시국 강연회가 종로국민학교에서 열렸는데 만명이 넘는 군중이 몰 려 연사들의 신랄한 군정 비판을 들었다. 이날 최고회의 의원들은 또다시 박정희 의장에게 김종필이 당직에서 물러나도록 해줄 것을 건의했다.
 
 
 박정희는 이 무렵 한남동의 외인주택을 안가로 빌어 쓰고 있 었다.
 
 2월 중순 어느날 밤이었다. 박정희는 석정선 정보부 차장보, 박종규 경호실장 등 측근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시국대책을 논의하 고 있었다. 이날 허정 과도정부수반을 만났던 박정희는 기분이 좋 아 있었다. 허정은 다른 민간 정치인들과는 달리 혁명정부의 업적 을 높이 평가하더란 것이다. 밤이 깊어가자 측근들은 흩어져서 방 에서 잠을 자든지 거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박정희는 석정선 과 둘이 남게 되자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자네, 어떻게 생각하나?'.
 
 '혁명한 사람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창피해 죽겠습니다. 국민들 한테 신용이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군인들의 신용이 민간 정치인들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럴 때 국민들 앞에 솔직하게 털 어놓고 이것 저것은 해결하겠다고 하면 순진한 우리 국민들은 납 득할 겁니다.'.
 
 '여보게,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내 생각도 들어 봐. 나는 이 렇게 생각해. 아주 형편이 없게 되었을 때 몽땅 망하는 것보다는 아직 남은 것이 있을 때, 즉 그 놈 아직 괜찮다라는 말을 듣고 있을 때 그만두는 용기, 그것도 멋있지 않을까.'.
 
 박정희는 그러더니 '야, 다들 깨워! 그리고 받아 써!'라고 하 더란 것이다. 석정선(현재 미국 거주)에 따르면 박정희는 박종규 에게 발표문을 구술했다고 한다. 석정선은 9개항목 가운데 '5·16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정치적 보복은 하지 않는다'란 조항은 36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구술을 끝내고는 '이걸 문장으로 만들어 내일 오전 10시까지 공관으로 가 져와'라고 지시했다. 한 측근이 '발표문으로 정리해서 가져가겠습 니다'라고 하니 박정희는 '안돼'라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또 마음이 변할지 몰라. 문장도 바꾸고 싶을지 몰 라. 그러니 무조건 시간 맞추어 가져와.'.
 
 2·18 민정불참 선언으로 알려진 박정희 의장의 '시국 수습에 관한 담화'는 여야정치인들에게 9개항의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수 락하면 자신은 민정에 참여하지 않을것이며 정치정화법에 의한 정 치활동 금지자들 전원을 풀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9개 조건은 '다음 정권은 5·16정신을 계승한다' '주체세력은 개인 의사에따라 민정에 참여할 수도 군에 복귀할 수도 있다' '유 능한 예비역 군인들을 우선적으로 국가가 기용한다' '모든 정당은 중상모략을 지양하고 정책을 내세워 신사적 경쟁으로써 국민의 신 임을 묻는다' 등등이었다. 박정희는 2월18일 이를 발표하면서 모 든 정당은 오는 2월 23일까지 9개항의 수락여부를 밝혀줄 것을 요 구했다.
 
 김종필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은 2월20일 오후 '일체의 공직 에서 떠나 초야의 몸이 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김종필은 자 가용 차를 직접 운전하여 서울 근교의 골프장에 나갔다. 따라붙은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보고 전진을 위한 후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사 휴의입니다. 충청도 사람은 하는 수 없다고 한답니다. 정말 나는 갖은 정열과 기백을 털어놓고 일을 했습니다.'.
 
 '라인강의 기적이 따로 있는 겁니까. 노력입니다. 우리 선조 들이 어떻게했습니까. 지척에 있는 재떨이도 자기 손으로 집지 않 고 마누라를 시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여건 아래에서는 지도자를 만들기도 힘들더 군요. 정치를 해보니 정열이나 기백 가지고는 안됩디다.새로운 질 서를 만들어 보겠다는데 원상복구를 하려는 세력들이 꾸준히 작용 하고...나는 세 가지 신념을 가졌습니다. 세대 교체, 올바른 질서, 그리고 강력한 행정체제 확립. 그러나 안됩디다. 그렇다고 실망은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걸 아는 사람들이 더 러 있습니다.그런 사람들의 수효가 많아질 때 길이 트이는 거지요.'.
 
 한 기자가 '외국에나 다녀오시지요'라고 하자 김종필은 '그런 팔자가 됩니까'라고 답했다.
 
 2월21일 박정희 의장은 김재춘 최고위원(전 육군방첩부대장) 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하고 정보부장 김용순을 취임 두달도 안돼 해임한 뒤 최고위원으로 돌렸다. 그 며칠전 정보부 감찰실에 소속 되어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패싸움을 했다. 세가 불리해진 몇 사람 이 박정희 의장 공관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정보부병력이 출동하여 의장공관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 방에 내려가 있던 박 의장은 이 보고를 듣고 노발대발하여 정보부 장을 교체하게 되었다.
 
 6·25전쟁 때부터 박정희를 가깝게 모셔오면서 가정사에까지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던 김재춘은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인사 부 탁을 받았다. 차장으로 박원석 공군 참모차장(소장)을 발탁해달라는 청탁이었다.
 
 박원석은 김재춘과 같은 육사 5기 출신. 1948년11월 박정희는 특무대에 구속되어 남로당과의 연루혐의로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 에 박원석을 자신의 세포원이라고 허위진술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박원석도 구속되어 억울한 고생을 하다가 김정렬(뒤에 공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역임)의 도움으로 풀려났었다. 박정희는 이 때 진 빚을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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