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미국에 울분 토로
김종필은 총구에 기초한 권력기구를 대체할 국민정당을 만든다는 포부를 실천에 옮기다가 일단 좌절했다. 그런 김종필로서는 홀가분 하게 외유를 떠날 입장이 아니었다. 자신이 떠난 이후 공화당이 자생력을 가지고 걸음마를 뗄 수 있도록 뒷처리를 해두어야 했다. 군 정기간중 박정희 의장의 신임을 업고(때로는 박의장을 이끌면서) 거칠 것없이 국정을 요리해온 김종필은 공개정치 시대의 혼돈과 번민을 증언과 편지로 남겼다.
'어느 날…아마 그것이 (1963년) 2월초였다고 기억됩니다. 이름 을 밝힐 수 없는 네 최고위원이 나를 찾아와 조용히 만나자고 했습 니다. 그들 옆구리에는 저마다 묵직하게 권총이 매달려 있었습니 다. 나는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 앞에서 외투를 벗어버렸습니 다. 내가 권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서였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내 소신을 그들에게 밝혔습니다. 살벌하 던 그들도 권총을 풀어놓고 장시간 얘기를 했지만 나는 그날 밤 또 한번 죽음을 각오했음을 고백합니다'(1960년대 후반 동아방송과의 대담 프로).
'생은 양측에 끼여 진퇴유곡의 처지에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고민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더불어 방황해왔음을 고백하오며 능력도 없는 생이 감히 그러한 어려운 일을 스스로 맡고 나섰던 것을 뉘우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 정말 생에게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고력을 상실한 생은 이성만은 잃지 않겠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많은 기자들의 시달림을 피하여 내일 하루라도 혁명동지와 당의 일에서 벗어나 혼자 앞일을 곰곰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공화당 창당준비 부위원장 정구영에게 보낸 편지).
김종필은 공화당이 창당대회를 갖기 하루 전인 1963년 2월25일 오후 서북항공편(노스웨스트)으로 도쿄를 향해 떠났다. 출발 전 중 앙청에서 기자회견을 한 그는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이 반, 외부의 권유가 반이었다'고 했다.
동아일보 이만섭(현재 국민회의 고문)기자가 이 말을 '자의반 타 의반'이라 요약하여 유명하게 만들었다. 김종필은 김포공항에서 기 자들에게 '혁명을 일으켰던 터키, 이라크, 버마 등을 순회대사 자격 으로 둘러보고 혁명의 뒷처리를 살펴볼 계획이다. 그 결과 혁명지도 자가 집권해야 한다는 결론이 서면 (민정불참을 선언한) 박정희 의장에게 출마를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김종필은 '이 나라를 바로잡을 분은 그분밖에 없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김종필은 보좌관과 통역관만 데리고 떠났다. 다음날 김종필은 도 쿄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 도쿄특파원 이환의(뒤에 문화방송 사 장)기자와 만나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기자회견도 했지만 꼭 해야 할 말은 못하 고 떠났습니다. 비행기안에서까지 일본 마이니치 신문 기자로부터 별의별 질문을 당했지만 참으로 하고 싶은 말들은 끝내 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말았어요.'.
이기자가 '그 하고싶은 말을 듣고싶다'고 재촉하자 김종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내적인 문제는 그만두고라도 미국의 대한정책이 알맹이 없는 형식만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려 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 의 쓸개도 뼈다귀도 없이 자기들에게 고분고분 머리를 숙이는 사람 들을 앞에다 내세우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중앙청 기자실에서 누군가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았지만 차마 이렇게 표현할 수는 없었어요. 자주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나의 신념입 니다.'.
김종필은 '구정치인들이 별의별 모략과 배신을 되풀이하고 있는 데 이들은 인생수업을 다시 받아야 할 것'이라면서 '내 한 몸이 만 싱창이가 되더라도 공화당에 뭉쳐 있는 이념적 동지들이 꿋꿋이 뻗 어나간다면 나는 혁명을 한 보람을 느낄 겁니다'라고 했다.
김종필이 미국측에 대하여 울분을 터뜨린 것은 이유가 있다. 5·16 직후부터 미국은 김종필을 군부내의 급진적 민족주의세력(또는 반미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를 정치적으로 거세하는 것을 대한정책의 기 본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1963년에 들어서 박정희 - 김종필 세력이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자 미국은 이것을 호기로 판단했다. 미국은 김 종필을 공화당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박정희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킨 다음 박정희에게 압력을 가해 민간 정치인들과 연합정권을 만들도록 한다는 구상도 했다.
사뮤엘 버거 주한 미국대사는 2월13일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 서 그런 연합정부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는 박정희, 국무총리로는 허정을 상정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날 국무부는 버거 대사에게 보 낸 훈령에서 '박정희 없이도 군부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정부를 구 성할 수있을 것이다'는 제안을 했다. 버거 대사는 이즈음 야당과 군 부에 공작하여 박 - 김 세력을 협공하는 전술을 쓰고 있었다. 이 시 기의 미국측 미밀전문들에 나타난 김종오 육군참모총장의 태도는 친 미이고 반김이다.
김종필이 출국한 다음날(2월26일)에 열린 공화당 창당대회에서 총재로 뽑힌 정구영의 생전회고에 따르면 미국 대사관에선 김종필의 거세를 유도하기 위해 식량원조를 중단한다는 말을 혁명정부를 향해 퍼뜨렸다고 한다. 김종필은 버거 대사를 밤중에 찾아가 원조중단설 을 놓고 격론을 벌이고 돌아와 자신의 집에서 기다리던 정구영에게 대화내용을 소개해주었다.
정구영은 박정희 의장이 민정불참을 결심하게 된 큰 이유도 미국의 원조중단 압력때문이라 이해했다고 한다. 박의장은 미국이 양곡 원조를 중단할 때에 대비하여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을 일본에 보내 밀가루 도입교섭을 하고 오도록 했다. 이 교섭이 성공하고 미국이 양곡원조를 끊지 않는 바람에 우리 정부는 많은 밀가루를 보유하게 되었고 1963년말의 두 차례 선거에서 이를 득표전략에 이용하게 된 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