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쿠데타 음모 사건
박정희 의장은 1963년 3월9일 토요일 오후3시부터 두시간 동안 사뮤 엘 버거주한 미국 대사와 필립 하비브 참사관을 청와대로 초청해 장시간 요담했다. 회담 내용을 묻는 기자들에게 미 대사관 대변인은 '관례상 청와대측이 먼저밝힐 문제'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박정희는 이날 이틀 후에 발표할 사건에 대해 미리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3월11일 오전 10시 김재춘중앙정보부장은 군부 쿠데타 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김동하 전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박임항 건설부 장관 및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을 비롯한 육군·공군의 현역 또는예비역 장교, 그리고 3명의 민간인 등 20명을 구속하고 한 명을 수배했다.
이들은 '현정부가 실시한 기성 정치인 전면 해금에 불만을 품고' 박 정희 의장과 최고위원, 기성정치인들을 무력으로 살해하거나 기타 방법 으로 제거하여 유혈로써 정권을 장악하려 기도했다>.
기자회견장에서 김재춘 정보부장은 '조사 범위에 따라 구속자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3월13일엔 11명의 추가구속자 명단이 발표되 었다. 첫날 구속·수배된 21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박임항(건설부 장관, 육군중장, 만군 출신, 함남 태생), 김동하(전 최고위원, 예비역 중장, 만군 출신, 함북 태생), 박창암(전 혁검부장, 예비역 준장, 함남 태생), 이규광(국토건설단장보좌관, 육사3기, 예비 역 준장, 경북출신), 김명환(육본 작전참모본부, 육군 대령, 황해도 출 신), 이종환(공군10전투비행단, 공군중령, 서울태생), 권창식(공군10전 투비행단 대대장, 공군중령, 서울태생), 서상순(공군본부 인사국, 공군 중령, 강원태생), 김동야(공군야전사32정찰대장, 공군중령, 함북태생), 이승국(공군본부 인사국장, 공군중령, 공군행정2기), 강계삼(국방부 기 획조정관, 육군 대령, 육사8기, 함남 태생), 박준호(육사 생도대장, 육 군대령), 양한섭(동화통신사 기자·경남태생), 이종태(전 HID인천대장, 예비역 대령, 육사4기 미검거), 김영하(회사원, 예비역 대령), 이종민 (전최고회의 전문위원), 이진득(3사단 부사단장, 육군대령, 함남태생), 박병섭(해병대 서울지구 헌병대장, 해병4기,경남 태생), 방원철(전 치 안국정보과장, 예비역 대령, 함북출신), 김광식(전 최고회의 전문위원)>.
이들 21명 중 육군 전투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은 아무도 없 었다. 또 이들 중 박임항, 박창암, 김동하 및 방원철은 함경도 군맥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구속자 20명 중 함경도 출신이 7명이었다. 이 때 문에 함경도의 별명인 '알라스카'를 따서 이 쿠데타 음모사건을 군 내 부의 함경도 인맥 거세작전이란 뜻의 '알라스카 토벌작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재춘당시 정보부장은 부임한 지 보름밖에 안된 상태에서 이 사건 을 발표했다. 김재춘은 최근 기자에게 '이 사건의 수사 발단은 쿠데타 모의에 참여했던 공군장교들이 공군참모차장 출신인 정보부 차장 박원 석장군을 밤에 찾아가 제보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박원석(뒤에 공군참모총장, 석유공사 사장 역임)은 '음모 자들이 직접 찾아온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나에게 그런 정보가 올라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이 정보에 따라 수사에 착수하면서 김 재춘은 박정희 의장에게도 보고했다. 박의장은 '확인해봐. 그런데 아마 사실일 거야'란 묘한 말을 했다고 한다. 김재춘은 쿠데타 모의의 중심 인물인 이규광 전 육군헌병감이 조사를 받고 있는 안가에 가서 직접 진 술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규광의 말에 따라 많은 연루자들이 속속 구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술의 진위가 궁금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규광 전 헌병감은 최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건은 엄청나게 과장된 것입니다. 내가 민정에 참여하려는 박 정희 의장에 불평을 품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조직을 구상한 것은 사 실이지만 실병력을 동원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쿠데타를 합니까. 공군장교들은 박정희 의장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진급문제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박의장이 2·27선서를 통 해서 민정불참을 선언한 이후에는 활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쿠데타 모의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사람들 가운데는 이규광 당시 건설부장관 보좌관이 박정희 의장이 민정불참 약속을 깨는 빌미를 만들 도록 실현성도 없는 이런 쿠데타 모의를 꾸며 박임항 건설부장관을 물 고들어갔다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을 강하게 부정한 이규광은 '나도 그 사건으로 2년 넘게 감옥살이를 했는데 무슨 소리냐' 고 했다. 이규광은 '박정희의 민정참여 계획에 불만을 품었다'고 기자 에게 말했는데 김재춘의 최초 발표에는 '기성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 허용에 불만을 품었다'고 하여이들 소위 음모자들이 군정연장을 바라는 인물이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가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결정적인 계기로 활 용되었다. 신문들은 일제히 쿠데타 음모 수사진행상황을 연일 1면 머리 기사로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 정보부에서 흘린 정보에만 의존한 탓인지 과장된 기사가 많았다. 김현철 내각수반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 의사를 밝혔다가 박의장의 만류로 취소되었다. 박병권국방장관 은 12일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으나 박의장은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박의장은 상황을 혼란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오히려 사태 반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