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에 대한 경례 다시!
1963년5월11일 공화당은 서울시내 교동국민학교에서 연설회를 가졌 다. 군중은 9일 전의 야당 집회 때에 비해 절반 정도인 약 1만5천명이 모였다. 이효상(뒤에 국회의장) 윤치영(뒤에 공화당 의장) 등 연사 들이'박정희 의장의 민정참여 당위론'을 주장해도 청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연사들이 미국의 원조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고 할 때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1963년에 들어와서 정치활동이 자유화되면서 언론의 정부 비판도 가혹해졌다. 예컨대 1963년5월16일자 조선일보는 5·16혁명 두 돌을 기념하는 정치, 경제, 역사학자 좌담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제목은 군사정부의 실적을 비판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군사혁명 두 돌···잘 해보려고 애는 썼는데' '이념이 없었던 공약' '실패로 돌아간 경제정책' '중대성명이 남발된 것도 큰 흠' '민 정이 양의 방법···군 지지 필요 운운은 어불성설'.
사회자도 미안했던지 좌담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가운데는 혁명 2년의 공은 없고 과만 추리신 것 같군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정치활동의 재개와 함께 언론의 정권 비판이 거세어지자 '언론은 잘 하는 것은 묵살하고 못하는 것만 찾아내어 침소봉대 한다' 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박정희는 지난 2년간 경제개발계획의 착 수, 울산공업센터 공사 착수, 각종 구조개혁, 외자도입, 자립심의 고취 등 도약의 발판을 놓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집권기간을 연장하고 정치안정만 보장되면 조국근대화를 이룰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던 박정희로서는 언론과 야당의 전면적 비판과 부정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 다.
그 후 학생, 언론인, 교수 등 지식인들에 대한 그의 거부감은 때로 는 경멸적으로 표현된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는 사농공상의 신분질 서를 상공농사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는 현대의 사자 계층인 지식인층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5월20일 박정희는 강원도 황지(지금의 태백시)에서 황지본선 개통 식에 참석했다. 통리-심포리(통리-심포리)간 8.5km를 연결하는 이 철도 공사엔 험준한 지형 때문에 11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21개월의 공사기간, 연인원 85만명이 들어간 이 철도부설로써 중앙선이 서울 청 량리역에서 출발, 경북 영주-강원도 철암을 거쳐 북평-강릉까지 연결 되었다. 대관령 동부 지역의 발전과 이 지방의 석탄개발 촉진에 중요 한 수송선이 완성된 것이다.
혁명정부의 의욕이 담긴 이 철로 준공식에 참석한 박의장은 치사를 하기 위해서 단상에 오른 뒤 단하에 정렬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마 치 조회시간에 학생들을 야단치는 교장처럼 말했다.
'본인이 치사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오늘 여기 식장에서 보고 느낀 몇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런 행사에서는 반드시 애국가 봉창,국 기에 대한 경례가 있습니다. 아까 보니 뒤에 와 있는 인사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도 남의 일 보듯이 하고 있었고 애국가를 부를 때도 따라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방에 계신 분들은 이런 행사 를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앞으로 이런 행사를 할 때는 사 회를 맡은 분이 '지금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합시다. 모든 분들은 저 뒤에 있는 국기를 향해서 전부 오른 손을 왼 가슴위에 얹어 가지고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합시다' 이렇게 하십시오. 오늘 이 식이 끝난 다음 마지막 순서 다음에 사회자는 다시 한번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 국가 봉창을 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정희는 5월21일 오후 육군 수뇌부를 교체했다. 참모총장 김종오 대장을 합참의장으로, 1군 사령관 민기식 중장을 참모총장으로, 1군 사령관엔 장창국 2군 사령관을, 2군 사령관엔 김용배 참모차장을, 참 모차장에는 김계원 국방부 운영차관보를 임명했다. 박의장은 자신의 민정참여 노선에 제동을 걸었던 박병권 국방장관을 김성은으로 교체한 데 이어 박병권과 보조를 같이 했던 김종오마저 2선으로 물러나게 한 다음 그 후임에 박의장의 민정참여를 촉구해온 민기식을 앉힘으로써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박의장의 마음이 공화당을 떠난 것 같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자 공화 당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김재춘의 중앙정보부는 한편에 선 범국민정당 결성을 지원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김용태 강성원 등 공 화당의 핵심 인사들을 수사대상으로 삼아 구속했다. 김용우 박준규 김 재순 등 공화당에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은 김재춘이 밀어주던 범국민 정당으로 옮겨갔다. 혁명주체 세력의 전국 모임인 5월동지회도 공화당 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범국민정당은 군민합작이란 명분은 좋았으나 이념의 공유가 안된 이질감을 해소할 수 없었다. 혁명주체세력과 그들이 경멸해마지 않았던 구정치인들이 손을 잡고 혁명정신을 계승할 정당을 만든다는 것이니 여론과 언론의 뒷받침을 받기가 힘들었고 공화당 같은 튼튼한 하부 조직과 지방조직을 갖춘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화당은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여 오히려 내부 단결과 개혁을 강화 하고 있었다. 말썽 많던 사무국 조직을 감축했다. 유급직원 1,300명을 4분의 1로 줄였다. 당원확보 운동도 전국적으로 벌여 5월20일까지 20 만을 넘겼다. 정일권의 후임으로 주미대사로 떠난 김정렬 의장 후임에 는 노련한 윤치영이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정책위의장 자리엔 법학교수 출신 백남억이 앉았다. 정구영 총재-윤치영-백남억은 박정희의 마음을 공화당쪽으로 돌려놓으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