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고인맥의 태동
박정희가 1963년 7월에 들어서서 공화당과 친김종필 세력을 중심 으로 권력구조를 재편성하고 선거체제를 갖추자 사뮤엘 버거 미국 대사는 당황했다. 김종필 세력을 박정희와 떼어놓고 가능하다면 민간인들이 정권을 잡도록 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던 버거 대사는 7월15 일 미 국무부에 종합분석 및 대책을 건의한다. 버거는 이 비밀 전문 에서 박정희의 이번 조치로 외유중인 김종필이 조기 귀국할 가능성 이 있으며 친공전력을 가진 인물들의 영향력이 강화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우리는 반대세력과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했 다. '이는 기습적인 행동으로써 현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목적에 서가 아니라 상황변화로 군사정부를 대체할 세력이 필요할 때에 대 비하여 반대세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거 대사는 미국 정부가 취하여야 할 조치로서 '군사정부의 재정안정정책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를 대어 1,500만 달러의 원조집행을 보류하기로 한 결정 을 고수할 것, 증권 조작사건·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 같은 군 사정부의 과오에 대한 미국 언론의 관심을 자극할 것, 김종필의 귀 국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할 것' 등을 건의했다.
최근 김종필 총리는 이런 술회를 했다.
'그때 버거 대사와 CIA한국지부 요원들은 엉뚱한 첩보에 너무 의 존하고 있었습니다. 박의장을 이집트의 나기브, 나를 나기브를 추방 한 낫세르로 오인한 듯했습니다. 우리를 반미 민족주의자라고 단정 한 선입견이 너무 오래 갔어요. 그 뒤 버거 대사는 월남에서 부대사 로 일했는데 그때가서 만나니 자신이 한국상황을 오판했다고 고백하 더군요.'.
이 무렵 김종필은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미국 CIA요원들이 자신 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보좌관과 함께 파리의 한 아파트의 월세 80달러 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개미가 많아 약을 뿌려놓고 나가곤 했어요. 일주일쯤 여행을 한 뒤 돌아와보니 실내 장식이 바뀌고 개미는 사라지고 아주 근사하게 변해 있어요. 관리인을 불러서 따졌어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돈을 더 줄 수는 없다, 왜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이렇게 했느냐. 그러니까 관리인이 대뜸 '선생님은 뭣 하는 분이세요'라고 묻는 겁니다. 얼마 뒤 미국에 들렸을 땝니다. 뒤에 CIA부장을 지낸 콜비가 그땐 아시아 담당 국장인데 마중을 나와 저를 사교 클럽으로 안내를 해요. 내가 '당신들은 파리에서도 나를 따라다니던데···' 라고 하니 콜비는 웃으면서 '이제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 았으니 오늘은 그것이 없을 거요'라고 웃더군요.'.
김종필의 외유로 허전해진 박정희의 주위를 채우면서 새로 등장 한 정치참모군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 실장과 엄민영(뒤에 내무장관)최고회의 의장 고문이었다.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출신인 이후락은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서 장면 총리 직 속의 중앙정보위원회 책임자로 있다가 군사혁명을 만나 한때 투옥되 었다. 김종필이 그를 풀어주고 영자신문 '코리안 리퍼블릭'을 발행 하던 대한공론사 사장으로 앉혔다.
김종필이 떠난 후 이후락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박의장에게 보 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한 자문과 건의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 다. 비로소 그의 명석한 상황분석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군에 서 정보 분야에 오래 근무해온 이후락은 최고회의 대변인으로서 기 자들과 상대하면서 세상 물정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갖게 되었다.
엄민영은 경북 경산출신으로 박정희보다 두 살 위였다. 경북고교 의 전신인 대구고보를 졸업했다. 뒤에 박정희 대통령의 직계가 되는 공화당 4인 체제의 두 사람 백남억(정책위 의장)과 김성곤(재경위원 장)은 엄민영의 대구고보 동기생이다. 큐슈 제국대학에 재학중 고등 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20대에 전북 임실, 무주군수를 지낸 엄 민영은 해방 후에는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냈고 5·16혁명이 났을 때는 참의원 의원으로 있었다.
박정희는 혁명에 성공하자 구정치인들 가운데서는 맨 먼저 엄민 영을 고문으로 발탁하여 그의 조언을 들었다. 엄민영은 범국민정당 조직 때는 김재춘과 함께 구정치인들을 끌어들이는 일을 하다가 박 정희가 공화당을 선택하자 범국민정당(뒤에 자민당)내의 친공화당파 를 이끌고 공화당에 합류하는 데 앞장섰다. 미국에 장기 체류중이던 김성곤 전 자유당의원에게 귀국을 독촉하여 1963년11월26일의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도록 한 이도 엄민영이라고 한다.
민정이양 과정을 거치면서 박정희 의장 주변엔 경북 출신 정치인 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한다. 엄민영, 김성곤, 백남억 이외에도 이효 상(뒤에 국회의장 역임) 박준규(공화당 의장서리 역임) 신현확(뒤에 국무총리 역임) 같은 이들이다. 경북인맥의 창설멤버에 해당하는 이 들 여섯명은 모두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 동창이다. 경북지방은 인구가 많은데다가 일류 명문고는 경북고 하나뿐이어서 인재가 많이 모였다.
이 학교 출신들은 또 관료나 정치가, 또는 장교 지망율이 유달리 높았다.
대구와 인연이 많은 박정희는 자연스럽게 이런 인재풀을 이용하 게 된다. 역대 장관 40명, 역대 국회의원 64명과 대통령·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3부 수장을 모두 배출한 경북고 전성시대는 세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와 겹친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