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의 승리
외유를 떠난 공화당의 산파 김종필을 이어 공화당을 이끌던 정구영 총재와 윤치영의장은 1963년 5월 하순 성공적인 광주 지방 연설회 후 박의장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박의장에게 공화당과 범국민정당 중 양 자택일을 요구했다. 이미 김재춘 정보부장의 범국민정당운동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박의장은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했다.
'이렇게 발표해주십시오. '박의장은 정구영 총재를 면담한 자리에 서 '내가 믿는 정당은 민주공화당뿐이다. 더욱 더 당세 확장에 힘을 써 유종의 미를 거두어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했다'고 말입니다.'.
박정희 의장은 최고회의 이후락 공보실장을 부르더니 발표문을 구술시켰다. 이후락 실장은 '이러시면 곤란해집니다. 각하께서 범국민정 당을 만들어보라고 하셔놓고서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믿는 것은 공화당뿐이다···' 이 말씀만 빼시지요. 더욱 더 당세확장에 힘써달라는 취지로 말씀하셨다고 하면 다 알아듣지 않겠습니까.'.
이 발표가 나가자 5월23일 범국민정당 창당의 막후 책임자 김재춘 정보부장은 기자들에게 '그 발언은 정구영 총재의 방문에 대한 의례적 인 반응일뿐이다'라고 말한 뒤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공화당은 민정을 담당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대세는 공화당으로 기울고 있었다. 범국민정당 창당 작업 자체가 박정희 의장의 지시로 시작된 것이므로 박의장이 이 작업에 흥미를 잃으면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5월27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공화당은 1,427명의 대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전당대회를 열었다. 정구영 총재는 인사말을 통해 '의당 박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야 하겠지만 이번 전당대회에서는 보류 해주었으면 한다는 박의장의 당부가 있었다'고 전했다.
토의사항으로 대회가 진행되었을 때 서울의 홍헌표대의원이 긴급동 의 발언을 했다. '의사일정을 변경하여 박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 하여 통보하자'는 요지였다. 흥분한 대의원들이 이 제안에 동의하여 즉석 기립표결로써 박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정구영 총재, 윤치영 의장, 김동환사무총장은 급히 박의장을 만나고 와서 이렇게 보고 했다.
'박의장께서는 수락할 용의가 있으나 필요한 절차가 있으니 시간적 여유를 주었으면 한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공화당은 재빨리 기선을 잡고 박정희의 선택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갔다.
6월10일 범국민정당 추진세력은 조선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발기준 비대회를 갖고 위원장에 구민주당 구파 출신 소선규, 부위원장에 공화 당 탈당파 출신 김용우(전 국방장관)를 추대했다. 14일에는 당명을 당 시 일본 여당과 꼭 같이 자유민주당(자민당) 으로 정했다.
발기준비위원들의 출신성분은 그야말로 빙탄의 혼재였다. 안동준등 전 자유당 출신, 조영규 등 야당인 민정당 탈당파, 김재순 등 공화당 탈당파, 고기봉 등 민주당 탈당파 등등. 박정희가 그토록 염원했던'신 세대의 참신한 정치세력 구축'과는 한참 먼 얼굴들이었다. 당시 경향 신문 정치부 기자 이상우는 이런 인상기를 남겼다.
<세종로 네거리에 있던 의사회관(지금의 교보빌딩 자리) 3층 범국 민당 사무실은 각계 정치세력의 집산지와도 같은 인상을 풍겼다. 활발 한 움직임과 여기에 드나드는 기라성 같은 정객들의 얼굴에도 불구하 고 이범국민정당 운동은 기자들 눈엔 도떼기 시장, 기회주의자들의 집 결체인 것처럼 보였다. '군민합동의 안정세력 지향'이란 당면목표만 있을뿐 그 위에 서 있어야 할 조직철학이 없었다. 때문에 이념보다는 다분히 실익을 내다본 기회주의적인 이질인사의 집합체로 전락할 가능 성이 처음부터 컸다.>.
박의장이 이 정당운동을 외면하자 급속한 와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똑 같은 관제여당이면서도 공화당이 5월동지회와 범국 민정당의 도전을 물리치고 박정희란 기수의 간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은 산파 김종필의 승리이기도 했다.
5월동지회와 범국민정당이 이렇다 할 이념을 갖지 못하고 잡다한 계열과 출신의 집합체로 변한 반면, 공화당은 김종필 주도의 사전 조 직을 통해서 조국 근대화란 뚜렷한 이념을 공유하는 정치집단을 전국 적으로 확보해놓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증권시장 조작으로 마련한 든 든한 자금이 있었다. 김종필이 군정시대에 1년 먼저 당을 조직했다는 점도 다른 급조된 정당에 비해 큰 장점이었다.
김종필이 악역을 맡아 욕을 얻어먹어가면서 확보한 이념과 자금, 그리고 인재로 해서 공화당은 산파의 손을 떠나서도 스스로 위기를 돌 파하는 자생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런 힘이 그 뒤 이 정당을 국가 근대화의 중심적인 정치세력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박정희는 공화당과 범국민정당(자민당), 그리고 5월동지회를 서로 경쟁시켜 두 달 정도 그 능력을 시험해보다가 7월4일 '자민당은 공화 당과 합당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미 우위를 확보하고 있던 공화당 은 당 대 당의 통합을 거부하고 자민당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입당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자민당내 엄민영 이갑성 등 친 공화당파는 자민당 잔류파와 헤어지고 공화당과 합류했다.
7월12일 박의장은 범국민정당 창당운동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김 재춘 정보부장을 무임소장관으로 돌리고 후임에는 친 김종필-공화당 노선의 맹장 김형욱 최고위원을 임명했다. 박정희는 이로써 군부와 공 화당,그리고 정보부를 박-김라인으로 재정비하여 선거체제를 갖추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