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형 인간군의 등장
1963년 정치의 계절. 정권을 놓고 치열하게 벌어진 정쟁의 소용돌이 에서 박정희가 한국인과 한국정치를 다루는 원리를 고되게 배우고 있던 바로 그때 경제계에서도 한 거인이 등장하여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면서 거보를 내딛고 있었다. 불도저와 크레인으로써 우리 국토의 풍경을 바꾸어놓게 되는 정주영은 1963년 현재 박정희보다 두 살이 위인 마흔여덟이었다.
그는 박정희가 만든 조국 근대화란 무대의 한 주인공이 될 운명이었 다. 박정희가 정주영을 만들었고 그 후 정주영은 박정희와 대한민국을 더욱 크게 보이도록 할 것이다. 냉철한 혁명가의 창조물인 '국가건설' 이란 시대정신을, 우리 민족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와 스케일 감각으로 구현하게 될 기업인 정주영은 개발연대의 중심업종인 건설업 을 통해서 근대화의 현장에 나타난다.
박정희는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 기간중 여러 가지 정치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로, 댐, 발전소,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1962년엔 정부총투자의 53.3%, 63년엔 38%, 65년엔 39.3%, 66년에는 37.1%를 투자했다. 이에 따라 이 기간에 건설업 매출액의 연평균 성장률은 17.4%를 기록, 국민총생산 성장률의 2.3 배나되었다. 1960년부터 이미 국내 최대의 건설업체이던 현대건설은 이 기간에 건설업 평균 성장률보다도 4배나 빠른 연평균 72.3%의 성장률을 보였다.
고정급료를 받는 종업원수는 1962년의 2백 명에서 1966년엔 846명으 로 불었다. 사장은 정주영, 부사장은 동생 정인영, 상무는 정세영. 이 명박은 1965년에 해외파견 사원으로 입사했다. 1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 올린 현대건설의 매출액 가운데 90% 이상이 정부가 발주한 공사 였다.
제2·제3한강교, 강화교, 거제대교, 부산 감천 화력, 영월 화력, 군산 화력발전소, 진해 4비료공장 부두 건설공사, 울산 부두 확장공사,춘 천발전댐 등등의 건설 목록은 세월이 흐르면서 한없이 길어져간다.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저력과 경쟁력, 그 원천이 경쟁과 시련의 현장 인 건설업에서 성장한 기업체질로써 설명하곤 한다. 그는 '건설업에서 단련된 경영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주영은 조선업도 쉽빌딩(Shipbuilding)이란 말 그대로 건설업의 일종으로 파악 하여 성공시켰을 정도로 건설업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다른 업종으로 확장한 기업인이다. 건설업에서 요구하는 경쟁, 시간 단축, 기동성, 집중성, 규율, 임기응변은 바로 압축성장시대에 필요한 한국인의 특질이기도 했다. 정주영은 사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건설업이 가장 어려운 사업입니다. 생리, 언어, 국적, 습관, 그리 고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더구나 일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고 말 사람들에게 의욕을 불어넣어가지고, 그것도 자연의 모든 악조건과 싸워가면서 이윤도 내고 동시에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여 다음 공사로 가야 하는모든 과정이 일반 제조업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건 설현장을 성공적으로 치룬 사람은 어떤 일을 맡겨도 성공할 수 있다,이렇게 확신합니다.'.
1962년 정주영은 미국 국제개발처(AID) 차관 425만 달러를 도입,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착공했다. 연산 20만t 규모였다. 차관도입에 따른 원리금 상환을 정부가 AID측에 보증하는 방식이었다. 정부는 경제건설 시기에 시멘트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하고 1차5개년 계획기간중 쌍용시 멘트, 한일시멘트, 그리고 현대의 단양시멘트 공장을 허가했던 것이다.
정주영 사장은 이즈음 매주 일요일이면 청량리역을 출발하는 중앙선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단양 건설현장 근로자들은 금요일 오후부터 '호랑이 오나?'하고 묻고 다니곤 했다고 한다. 정주영은 어느 날 기차 에서 잠에 들었다가 단양역을 지나친 뒤 깨어나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렸다. 캄캄한 밤을 더듬어 징검다리를 건너고 산골 길을 30리나 걸어 서 새벽에 현장에 도착했다. '호랑이'가 현장에 안올 줄 알고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서던 사원들은 들이닥친 호랑이의 얼굴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호랑이가 현장을 떠나면 직원들은 '공습경보 해제!' 라고 외쳤다고 한다.
매주 일요일 독려만으로는 성이 안찬 정주영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예열실 슬라브 콘크리트는 쳤는가, 밀(Mill)실 바닥 콘크리트는 했느냐 는 식으로 질문을 해댔다. 어느 때는 담당자가 아닌 직원이 전화를 받고 모른다고 대답하다가 정주영의 고함에 수화기를 놓아버리고 도망친 사건도 벌어졌다.
정주영은 서울 원효로에 있던 중기공장에는 매일, 어떤 날은 하루 두번도 들려 아침에 다녀갔으니 내일 오겠지 하고 지시받은 일을 내일로 미루고 있던 직원들을 혼비백산시키기도 했다. 일과 시간에 대한 정 주영의 다음과 같은 술회는 개발연대의 행동철학이기도 했다.
'나는 아무리 어려운 일의 지시에도 긴 시간을 안준다. '내일 아침 까지 해놓으시오'. 시간을 길게 주면 내일, 글피로 미루어놓고 다른 일 을 계속하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 후다닥 지시한 일에 들러붙어 만들 어내기 때문에 졸속이 뻔한 쓸모 없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다. 나는 누가 뭐라든 내 철저한확인과 무서운 훈련, 끈질긴 독려가 오늘의 현대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선진국을 따라잡자면 그들이 쓰는 10시간을 우리는 20시간, 30시간으로 늘려 시간을 극복하는 것과 유능하고 진취적인 경 영자들을 키워내는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매일이 새로워야 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 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