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대 혁신
박정희 후보는 당선이 확실해진 11월17일 오전 경주 불국사 관광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정국안정, 자립경제의 달성, 지도체계의 확립을 기하여 조국근대화를 위한 강력한 정치를 펴나가겠 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이 자리에서도 '서구 민주주의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민주주의는 사람으로 치면 중학교 학생 수준 정도밖에 안 됩니다. 중학교 학생들에게 극장출입을 못하게 하고 술과 담배를 먹 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어느 정도 제한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기자들이 '그런 제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라고 묻자 박정희는 '이를테면 기본권 같은 것'이라고 말할 때 배석했던 이후락 공보실장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것은 과거 혁명기간중에 그렇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후락이 박정희의 말문을 닫아버리는 꼴이었지만 박정희도 자신 의 본심이 솔직하게 노출되면 또 다른 시비를 부를 것 같았는지 순순히 따랐다. 윤보선 후보도 17일 밤 서울 안국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돈도 없고 조직도 그렇고 선거운동도 늦게 했는 데 예상외의 표를 얻었다'면서 '지고도 이긴 싸움이다'고 말했다.나중에 윤보선은 이 논리를 더 발전시켜 '투표에선 이기고 개표에선 졌다'면서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칭하게 된다.
10월17일자 조선일보의 선거결과 분석 기사 제목은 이 선거의 의미를 잘 요약했다.
'앞으론 '강력정치' 어려울 듯' '여야의 번지수를 완전히 뒤집은 셈' '남과 북의 숨막히던 표차' '자랑해도 좋은 민주력량' '다소 잡음 있었지만 처음 맛본 공명' 이 5대 대통령 선거가 비교적 공정했 음을 나타내는 한 자료는 군인표가 윤보선 후보쪽으로 더 많이 쏠렸다는 점이다. 군인 가족들이 많이 몰려사는 강원도 춘천과 원주에선 윤보선이 박정희보다 두배나 더 많은 표를 얻었다(원주시의 경우 윤 보선 21,228표 박정희 10,357표).
이 비율은 강원도 전체의 표수가 박정희 약30만, 윤보선 약37만 표였던 것과 비교해서도 군인표가 더 반박성향이었음을 드러냈다. 박정희의 고향인 경북 선산군에선 박정희 표가 윤보선의 약5배였다. 충청도 표는 윤보선 지지로 더 많이 쏠렸지만 김종필의 고향인 부여군 표는 근소한 차이로 박정희쪽으로 더 많이 갔다.
이 선거의 표 흐름은 남북과 도농의 2중 단층구조였다.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남부지방과 전국의 농촌지역 주민들은 대체로 박 정희 편에 섰다. 전국 도시 지역과 서울 경기도 충청도 등 북부지방 사람들은 대체로 윤보선을 찍었다. 이 선거의 가장 큰 주제가 된 사상논쟁은 휴전선과 가까워 반공적일 수 밖에 없는 지역의 주민표를 윤보선 후보쪽으로 밀어주었다.
좌익세가 강했고 6·25전쟁중 용공으로 몰려 많은 민간인들이 피 해를 본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등 남부지역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사상논쟁의 득을 보았다. 비율로서 박정희 표가 가장 높게 나온 곳은 4·3공산폭동 때 억울한 민간인 피해자가 많았던 제주도였다(박정희 70%, 윤보선 22%). 표의 남북 현상 때문에 추풍령을 경계로 36도선 이 새로 생겼다는 농담이 나돌 정도였다.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언 론의 영향력이 쉽게 전달되는 도시에선 윤보선이, 전통적인 가치관 이 상존하고 혁명정부의 중농정책에 공감하던 농촌지역에선 박정희 가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북부지방과 도시라는 성격이 겹치는 서울에선 윤보선이 박정희의 약 2.2배, 인천에선 약 2.5배나 되는 득표를 했다. 북부라도 경기도 용인군, 강화군, 옹진군, 강원도 영월군, 평창군에선 박정희 표가 더 많았다.
전남의 경우 박정희 후보가 약77만 표, 윤보선이 약48만 표였지 만 광주시와 순천시 및 목포시에선 윤보선이 큰 차이로 박정희를 눌 렀다. 경남도에서도 전체로선 박정희가 윤보선을 약70만 대 약34만 표로 크게 눌렀지만 마산시에선 윤보선이 이겼다. 부산직할시에선 박정희가 약24만2천, 윤보선이 약24만 표. 전체로서는 박정희가 압승한 경북지방에서도 대구시에선 박정희가 겨우 이겼지만 포항시· 경주시·김천시·안동시에선 윤보선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박정희가 다수표를 얻은 지역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때 진 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선전한 지역과 일치했다.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하여 이승만 정부 때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주도했 던 조봉암은 서울(득표율 17%) 경기(16%) 충북(11%) 충남(16%) 강원 (8%) 등 북부지방에서는 이승만 후보에게 크게 밀렸으나 전북(득표율 31%) 전남(18%) 경북(34%) 경남(30%)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기세를 올렸다. 조봉암은 결국 이때의 위협적인 득표가 원인이 되어 정치적인 수사·재판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박정희와 조봉암의 공통점은 6·25전쟁으로 공산당의 진면목이 드러나기전 한때 좌익에 경도되었다가 전향했고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는 점이다. 한민당-민주당-민정당을 보수정치세력(박정희식 의 분류로는 수 ·수구)의 본류로 본다면 박정희 - 조봉암은 진보- 개혁세력(윤보선식 분류로는 좌파)으로 볼 수도 있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