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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
 아름다운 시절
 
 1963년 11월5일 조선일보 토론회에 참석해 박정희와 김종필이 기치로 내걸었던 민족주의에 대한 격려와 견제를 피력했던 일곱 명중 4명은 그 후 신문사 사장, 장관을 지냈거나 국회의원이 됐다. 36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4학년이었던 국민회의 김경재 의원 은 '그때 대학생들에게 매판자본으로 인식되었던 기업은 이병철 씨의 삼성이었다'면서 '국익보다 사익에 몰입해 무조건 미국이나 일본에 기대는 태도가 대학생들의 비판의식을 자극했다'고 회상 했다.
 
 '당시 학생들은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눈여겨 보던 시절입니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민주냐 비민주냐의 결정을 내리고 있었지요. 우리는 그들의 거대한 수퍼 파워에 대 항하여 대결하기 보다는 그들을 길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 습니다. 그들의 국익에 너무 부합하면 간이고 쓸개고 모두 빼앗 기고 말 것이란 주장이었지요.
 
 그런데 우리의 시각이 묘하게도 박정희와 김종필씨의 시각과 일치하는 바람에 우리는 착잡했습니다. 당시 학생들 대다수는 윤보선씨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자 유 민주주의자였고,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고 보았던 겁니다. 거기에 비하면 박정희씨 쪽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는 측면 이 컸지요. 그런데도 박정희를 지지하는 대학생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러다 토론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토 론하다 보면 우리가 꿀릴 때도 있었습니다. 김종필이 서울대학교 에 초청되어 왔을 때는 제가 제일 먼저 질문을 했습니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구호처럼 보인다며 공격했지요. 김종필씨는 참 멋있 는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후 민주화 세력과 긴장 과 갈등이 지속되었습니다.
 
 저도 1972년부터 오랫동안 외국으로 도피생활을 했지만, 그 시대에 민주화 세력의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때였습니다. 지금 와서 박정희란 인물을 보면 공도 많고 과도 많다고 봅니다. 나는 아직 박정희를 개인적 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최근 '역사적 화 해' 발언은 존중합니다.'.
 
 김경재와 동창생인 이종률 전 장관은 '당시 학생들에게는 민 족주의적인 시각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고 회고했다.
 
 '독재와 부정선거에 반감이 많았던 대학생들은 군부가 등장하 자 암울한 시대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거를 통해 박정희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토론회나 강연회를 잇달아 열면 서 과감하게 정치에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에너 지는 4·19혁명으로부터 연유한 것이었지요. 몸으로 부딪히며 민 주주의를 일구었다는 자부심이 정치인들의 권위에 밀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지성'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지요.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이 10만이 안될 때였으니까 지금의 대학 생과 비교하기 보다는 오늘날의 언론인 정도의 수준으로 보면 될 겁니다. 먼 과거의 역사가 된 그 시대를 지금 와서 다시 보면 박 정희씨가 두번 정도만 하고 김종필씨에게 물려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장 많이 남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씨가 근대화를 통해 민주주의의 여건을 그것도 아주 크게 마련해 놓았다는 점은 기록에 남겨놓아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에 의한 근대화를 통해 시민의식이 성장했고 그 성장한 시민의식으로 하여금 박정희의 유신을 거부하게 하면서 민주화로 이행해 왔던 것이지요.이제는 남과 북을 아우르는 상이 필요할 때라고 봅니다.'.
 
 당시 고려대학교 법학과 4학년이었던 국민회의 조홍규 의원은 조선일보 주최 토론회에 참석하기 1년 반 전인 1962년6월6일 '한 미행정협정 촉구 데모'를 주동하다 구속된 경험이 있었다. 4·19 당시 좌익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반미데모를 제외하면 최초의 순 수 학생운동차원에서 시도된 반미시위였다고 말하는 조홍규 의원 의 회고-.
 
 '그 무렵 학생들의 분위기는 반미적이었습니다. 6·6 데모도 동두천과 의정부 주변의 양공주들에 대한 미군들의 행패에 분개 한 나머지 우리가 주도한 시위였습니다. 1963년 대선을 전후해 우리같은 대학생들이 바라 본 혁명정부는 이전의 역대정권보다 반미적이었음을 목격하고 있었지요. 마치 몸부림치는 인상을 받 았습니다. 우리들은 민족주의적이라고 생각했고 박정희에 대한 비판보다 미국에 대한 비판에 더 열을 올리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일년 뒤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으로 박정권이 너무 일본쪽으로 경도되고, 월남파병으로 다시 미국에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권력 과 끝없는 대립의 길로 나섰던 겁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 학생으로서의 수준이었고 논리였습니다만 나 스스로도 아름답게 생각 합니다. 자주적이기 위한 학생들의 비판적 태도와 아울러 정치인 들의 현실적인 태도가 서로 부딪히며 갈등하고 긴장하고 대립해 왔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아름답게 여겨지는 겁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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