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도세력의 등장
박정희와 동갑(1917년생)이지만 박정희보다 16년 먼저 암살된 케네 디의 장례식은 1963년11월25일 워싱턴에서 치러졌다. 성조기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케네디의 관은 국회의사당을 출발, 백악관 집무실에 잠시 머물렀다가 마태 성당에 도착하여 영결 미사를 치렀다.
박정희 의장은 다른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도보로 영구 행렬을 따 랐다. 마태 성당에서는 케네디 - 재클린의 결혼식에서 '아베 마리아' 를 축가로 불렀던 가수가 나와 이번엔 진혹곡으로 그 노래를 다시 불 렀다. 케네디의 유해는 포토맥 강을 건너가 앨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박정희는 5·16군사혁명 뒤 자신을 미국으로 초청함으로써 군사정 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지를 확인시켜준 케네디 대통령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 총선기간중 박정희를 마지 막으로 도와주기도 했었다.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는 한국정부가 재정 안정계획을 성실하게 지키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견제수단으로 미국이 동결해두었던 원조자금 1천5백만 달러를 지적하면서 '박정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고립되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참모들은 사뮤엘 버 거 대사에게 동결자금의 해제를 요구했다. 버거 대사는 미국정부의 입 장이 반박이란 오해를 받을까 걱정했다. 그는 워싱턴에 건의하여 총선 기간중 1천만 달러의 원조자금 방출을 발표하도록 했던 것이다.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제 6대(국회의원 선거 투표와 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1963년11월26일의 총선은 10·15대선 때와는 정반대의 큰 이변이었다. 미일과 우리 언론 기관의 예상(공화당의 과반수 미달)과는 반대로 공화당이 압승, 의석 수가 전체의 3분의 2선에 육박한 것이다. 131개 지역구 가운데 공화당 은 88석을 차지했다. 전국구인 비례대표제 당선자를 포함하면 공화당 은 전체 의석 175개 가운데 110석, 민정당은 41석, 민주당은 13석, 자 민당은 9석, 국민의 당은 2석이었다.
공화당은 약33%의 지지율로써 전체 의석의 약63%를 차지했다. 이는 물론 야당의 분열 때문이었다. 공화당은 박정희가 대선때 몰표를 받았 던 제주, 전남, 전북, 경남, 경북, 부산의 지역구 74개 가운데 58개소 에서 당선자를 냈다. 공화당이 과반수를 얻지 못한 곳은 서울뿐이었다.
민정당의 김영삼은 부산의 유일한 야당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주 당의 김대중은 전남의 유일한 민주당 당선자였다.
이 총선에서 김대중은 전국적인 쟁점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목포 경찰서 정보반장 나승원 경사가 민정당을 찾아가 폭로한 경찰의 '국회 의원 선거대책'이란 문서가 있었다. 경찰이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서 선거운동에 개입했다는 이 폭로는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되었다.
박정희 의장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지령한 경찰간부와 공무원들을 구속시키고 박경원 내무장관과 이소동 치안국장을 물러나게 했다. 김 대중 후보는 약 2만2천표를 얻어 공화당 후보를 배의 표차로 이겼다.
김대중의 선거참모로 참여한 사람중에 권노갑 비서가 있었다. 그는 1960년5·16혁명 직전에 있었던 강원도 인제 지역 보궐선거 때도 김대 중 후보를 도왔다. 권노갑은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오랫동안 목포를 떠나있었기 때문에 고향에 잘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을 보완해주기 위해 비서로 참여하게 되었다. 김 대통령은 나의 고향선배이시고 목포상고 4년선 배이다. 나는 동국대를 졸업한 뒤 미군의 통역을 하기도 하고 목포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서 각계각층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제6대 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들은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에게 안정의 석을 주었고 그가 주창해온 세대교체를 상당 부분 실현시켜주었다. 국 회의원 당선자들 가운데 20대가 1%, 30대가 21%, 40대가 46%로서 청장 년층이 전체의 약3분의 2나 되었다(50대는 21%, 60대는 10%, 70대는 1%).
40대의 박정희 - 30대의 김종필로 상징되는 젊은 국가엘리트 집단 이 두차례의 선거를 통해서 우리 사회 중심부에 등장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60대의 윤보선으로 상징되는 구정치세력이었 다. 해방후 우리나라에서 유교적 가치관을 밀어내고 가장 강력한 정치 이념으로 등장한 민주주의를 금과옥조로 삼고 있었던 이들은 민족사의 발전 단계상으로는 수구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국가근대화의 대세속 에서 떠내려가버릴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해준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1964년 봄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거치면서 60대가 이끄는 구정치세 력은 집요한 선전·선동술로써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을 야 당 편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하면서 생명력을 연장한다.
학생세력이 민족주의와 조국근대화를 내세운 젊은 박정희 - 김종필 세력을 밀지 않고 서구식 민주주의의 전면적(또는 무조건적) 실시를 요구하는 늙은 구정치세력 편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그 뒤 우리나라의 정치와 지성사에 갈등, 고뇌, 견제, 긴장의 불연속선을 만들어낸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