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 존슨 요담
김정렬주미 대사는 새벽잠에서 일어난 박정희 의장에게 워싱턴의 상황을 설명했다.
'여기 상황을 종합해보니 대부분의 국가원수들이 장례식에 참석하 기로 되어 있습니다. 김현철수반을 보내기로 하셨다는데 여기 사정을 감안하셔서 각하께서 꼭 오셔야겠습니다' '아, 일이 그렇게 되었소? 하지만 총선이 며칠 남지 않아 내가 떠나기가 정말 곤란한데···'.
김대사는 거듭 참석을 건의하면서 대사관의 참모들도 같은 의견이 라고 덧붙였다. 박정희는 '알았소'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케네디 대통령의 피살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충남 유성에서 유세하는 와중에도 조문하러 가느냐 마느냐로 고심했었다.
김용태(뒤에 공화당 원낸총무 역임)는 그때 유성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는데 박의장에게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는 세계 각국의 국가지도자들이 참석하 는데 각하와의 정분을 생각하셔서라도 꼭 가셔야 합니다.'.
박의장의 일부 참모들은 총선이 더 중요하다면서 방미를 반대했 다. 김용태는 다시 건의했다.
'대통령선거에서 이겼는데 공화당 의원이 좀 적게 당선되면 어떻 습니까. 각하께서 미국에 가시는 것이 오히려 선거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당선자가 늘지도 모릅니다. 여기 일은 우리한테 맡겨놓으시 고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십시오.' '그래, 내가 직접 가야겠어. 5.16후 나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나에 게 많은 용기를 준 사람이 아닌가.'.
박정희 의장은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박 의장이 시카고에 도착하자 김정렬 대사가 기내로 들어갔다. 박의장은 군 선배이고 남로당 관련 수사 때 자신을 많이 도와준 김정렬 대사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면서 '명에 의해서 왔습 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여기 사정이 꼭 오셔야 할 것 같아서 무리 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11월25일 박정희 의장은 부통령으로 있다가 케네디가 피살된 후 취임한 존슨 대통령을 예방, 한국인을 대표하여 조의를 전달하고 요 담했다. 박의장이 그 2년 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존슨 당시 부통령 은 비행장까지 마중나온 적도 있어 구면이었다. 존슨은 '군부가 약속 대로 민정으로 복귀하는 절차를 밟고 있고 분별 있는 선거를 관리한 점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는 또 '한일 양국에서 총선 이 끝나면 국교정상회담이 조속한 시일 내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기 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날 존슨 대통령은 조문하러 온 이케다 일본수상과 요담하는 자리에서도 똑 같은 희망을 피력했다. 이케다 수상은 이런 요지의 말 을 했다.
'박정희 의장의 공화당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기가 힘들 것 이기 때문에 조속한 국교정상화는 어려울 것 같다. 박의장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보수적이고 온건한 세력과 연합한다면 국내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일본도 가능한 한 빨리 국교정 상화 회담을 끝내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케다는 이어서 존슨 대통령에게 '한국은 잘 교육되고 부지런한 2천5백만 인구의 나라이다'라고 상기시킨 뒤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의 건전한 발전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조 건이다. 일본과 자유세계는 한국이 붕괴하고 공산화되는 것을 방치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일본은 최선을 다해서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룩하 려고 한다.'.
위의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의 진도는 한국의 정치안정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정치 안정은 경제뿐 아니라 외 교 교섭에서도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이다.
박정희의 케네디 대통령 조문은 존슨 대통령 정부와의 관계를 예 고하는 청신호였다. 군정이란 약점으로 해서 끊임없이 미국 정부로부 터 압력을 받아오던 박정희 정부는 두 차례의 비교적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국민의 심판을 받음으로써 정통성을 확립했다. 박정희 민선정 부가 추진한 2대 외교정책 -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은 미국이 한 국에 압력이 아니라 부탁해야 할 성격의 것이었다. 이제는 박정희가 대미카드를 쥐게 된 것이다.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원조란 대한카드와 한국의 이런 대미카드가 균형을 이루면서 이후 약10년간 한미관계는 안정되고 이 안전판을 바탕으로 하여 박정희 정부는 군사비 지출을 최소한도로 묶고서(미군의 우산 아래서) 경제 발전에 총력을 쏟게 된 다.
한미관계가 다시 악화되는 것은 1977년 카터 대통령이 집권하면 서부터이다. 카터는 케네디가 고 딘 디엠에게 가졌던 시각과 흡사한 각도로 박정희를 보았고 이로 인한 한미관계의 악화는 박정희의 죽음 으로 이어진다.
1963년 11월에 있었던 고 딘 디엠과 케네디의 암살, 그리고 카터- 박정희의 갈등과 박정희의 암살이란 두장의 필름을 겹쳐서 보게 되면 뚜렷해지는 어떤 모습이 있다. 그 모습은 민주주의를 도덕적 원칙뿐 아니라 외교 무기로 이용하는 강대국과 맞서면서 자주를 모색하는 약 소국 지도자의 운명 같은 것이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