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파독
파독 광부로 선발된 사람들 가운데는 광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낮에는 석탄공사 장성광업소 갱내에 들어가 채탄작 업을 실습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독일어를 배웠다. 파독 광부 1진 123명은 1963년12월21일 에어 프랑스편으로 서독을 향해서 떠났다.
공항에서는 해외취업자와 가족과의 이별이 있었다. 부산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광부를 지원한 우동천(당시 29세)의 아내 조영희(당시 26세)는 '3년간 헤어져 살게 되어 고달프지만 남편을 위해 희망 을 안고 기다리겠다'면서 눈물을 삼키고 웃음을 보냈다. 이런 장면은 개발연대의 공항과 항구에서 곧 익숙한 풍경이 될 터였다. 이 날짜 조선일보 사설은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 광부들의 서독행은) 실업문제의 해결이란 점에서 우선 다 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배울 점도 많을 것이다. 비록 갱내에서만 작업한다 하더라도 3년간이나 눈여겨 보노라면 습득 할 것이 많겠다. 이들이 3년간의 복무기간을 끝내고 돌아오면 국내 에서 모범 공원으로서 석탄개발에 이바지하는 바 적지 않을 것이 다. 또 독일인은 근면한 국민으로서 세계에 알려져 있다. 서독 경제부흥의 기적을 가져온 첫째 원인도 이 근면에 있다고 하는데 그들 과 같이 일을 하게 되면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먼저 간 사람들이 성심껏 일을 하여 능률을 올리면 신용을 얻어서 계속해서 한국에 인 원을 요청하게 되겠지만 한국사람은 못쓰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후진에게 길을 막게 될터이니 먼저 가는 책임이 크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해야겠다.>.
해가 바뀌어 1964년 2월21일자 조선일보는 '한국 광부는 우수하 다 / 라인강변에서 온 봄소식'을 전했다. 광부들이 노동청장 앞으로 보낸 편지를 소개한 기사. 광부 오학봉 등 3명은 '지난 7일에 시행 된 여러가지 지하 시험에서 우리 광부 250명은 한 사람의 탈락자도 없이 전원 합격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서독의 너그러운 근로조건에 감탄하기도 했다.
'지상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다쳤는데도 공상으로 취급 하여 놀아도 임금을 다 주고 감기나 배탈에 걸려도 통상 임금의 80% 를 받으면서 휴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광부의 파독 길을 뚫었던 이기홍(당시 경제기획원 차관보)에 따르면 '광산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대졸자들이 경험자보다도 독일 현지에서 더 잘 적응했다'고 한 다.
1960년 봄 재독 한국인 이종수 박사(본 의과대학 병원 외과의사) 의 주선으로 베를린 감리교 부녀 선교회와 프랑크푸르트 감리교병원 이 한국간호학생 두 명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2년부 터 매년 20명 정도의 간호학생들이 훈련과 교육을 받기 위해서 독일 에 파견되었다. 이종수 박사는 이 사업을 간호학생에서 간호조무사 와 간호사로 확대하여 1968년까지 1,200여명의 간호요원들을 서독에 취업시켰다.
서독 마인츠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 이수길 박사는 1964년 서독에 서 간호사들의 숫자가 모자란다는 점에 착안하여 서독 간호사와 똑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한국 간호사의 취업을 주선했다. 1966 년 128명의 간호사가 서독에 왔다.
두 민간인에 의하여 시작된 간호사들의 서독취업 사업은 1969년 부터 정부가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개입하여 1977년까지 10,371명의 간호사가 서독에 취업하게 되었다. 1973년 현재 서독 전체 병원의 12.6%에 해당하는 452개 병원에 6,124명의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있 었다.
주한 전 독일대사 클라우스 폴러는 '보통 독일사람들에게는 한국 간호사들과의 만남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의 첫 접 촉이었으며 많은 경우 아시아인들과의 첫 접촉이었다'고 했다. '한 국 간호사들의 유능함, 친절, 봉사정신은 독일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한국상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에 거주하는 독일인이 미국인 다음으로 많은 것도 간호사들을 매개로 하여 두나라 관계가 밀접해졌기 때문이다'고 했다.
한국 간호사들은 특히 '노인환자들에 대한 극진한 간호, 민첩한 업무처리'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독일사람들로부터는 '질서와 준 법정신, 근검절약, 신앙을 기초로 한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생활태도 를 배웠다'(홍익대학교 정해본 교수 '간호사 파 이 세계화에 끼친 영향').
연인원에서 파독 간호사 수는 광산근로자(8,395명)를 능가하게 된다. 몇년전 통계에 따르면 파독 간호사들 가운데 약 1,000명이 주 로 독일남자와 국제결혼을 했다고 한다. 여성취업과 해외취업이란 2 중의 벽을 넘은 한국 간호사들은 한민족의 핏줄 속에서 잠들어 있던 무서운 생존력과 적응력을 가장 먼저 자각시킨 이들이다. 간호사의 선진국 취업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 여성 취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루한 선입견을 깨는 데 기여했다.
1965년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을 포함한 해외취업자들이 국내로 송금한 외화는 상품수출액의 10.5%, 무역외 수입의 14.6%나 되었다. 1967년에 가면 월남파병에 따른 특수로 해외송금액이 상품 수출액의 36%, 무역외 수지의 31%를 차지하게 된다.
5·16 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정권에게 맨 처음 차관을 제공해주기 도 했던 서독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되어 1964년12월 박대통령의 방독으로 이어지지만 김형욱의 정보부가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잘못 다루면서 양국관계는 냉각된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