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계약?
1963년 정치위기와 함께 온 경제위기 속에서 박정희 의장은 민족 자본에 의한 정유공장 건설이란 당초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의 메이 저 석유회사 걸프와 합작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걸프와 대한석유공사 사이의 합작 사업 교섭이 계속되었다. 걸프의 교섭단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조선호텔의 한 층을 빌어 늘 7,8명을 상주시켰다. 원유판매, 운송, 기술, 차관, 법률 등 각계 전문가들을 대표 한 걸프측의 교섭 책임자는 제임스 E 리였다. 그는 필리핀의 걸프계 정유공장 책임자였다.
화이트포드 걸프 회장, 브라키트 사장, 밥 도 시 부사장 등도 수시로 한국을 들락날락했다. 한국프로젝트에 관계 한 이들은 그 뒤 걸프 경영층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밥 도시와 제 임스 리는 걸프 회장, 굿맨은 계열회사 사장을 역임한다.
유공측의 교섭단에는 김흥한 변호사가 끼어 있었다. 그는 장면총 리의 비서실장을 지냈다고 하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유공의 이성호사장이 회사법에 밝고 국제감각이 있는 그를 강권 하다시피하여 교섭단에 참여시켰고 그는 계약서 작성에서 중요한 역 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외환보유고가 1억 달러에도 미치지못한 상태에서 걸프가 약속한 투자가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목 마르게 바라는 입장에 있었다. 미국 정부도 같은 태도였다. 1975년 5월16일 밥 도시 걸프 회장은 미 상원의 다국적기업 소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걸프가 한국의 기간산업에 경영참여 형태의 투자를 하도록 요청 받았을 때 - 그 투자금액은 외국 민간회사로서는 최대 규모였다 -미 국 정부는 우리를 밀어주었다. 미국 정부는 해외보험공사(OPIC)를 통해 우리의 한국내 투자분에 대해 보험을 걸어두도록 했다.'.
미국 해외보험공사는 걸프의 투자분에 대해 재산이 몰수되거나 태환불능의 경우엔 200%, 전쟁으로 인한 경우엔 100%의 보상을 약속 했다. 그동안 미국은 한국에 대한 석유공급권을 미군이나 미국계 석 유회사를 통해서 독점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상당한 정치적 지렛대를 유지해왔었다. 그런 미국으로서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박정희 정 부의 석유사업에 미국계 거대석유회사를 참여시켜 놓는 것이 안전판 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공측과 걸프가 합의한 합작 투자안의 대 강은 이러했다.
·주식: 걸프가 489만 달러를 투자, 유공 주식의 25%를 인수한다.
·차관: 2,011만 달러(정유공장 건설용)를 연리 4,5%로 제공한다.
·원유공급: 유공은 15년간 또는 2억 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때까 지 적출항의 본선인도 가격으로 걸프의 원유만 도입한다.
·원유수송: 걸프가 독점한다.
·이사회 구성: 한국측 이사 4명(감사는 별도)에 대해 걸프는 이 사 3명과 감사 1명을 선임하며 예산안은 걸프측 이사와 한국측 이사 가 합의하여야 통과될 수 있다.
걸프는 25% 투자보다도 훨씬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 다. 두고두고 불평등 계약이란 비판을 듣게 되는 소지가 만들어졌다.
박정희 의장에게 유공측 교섭단의 최덕빈 변호사가 협정안을 보 고하자 박정희는 듣기만 했다. 차균희 기획원 차관은 유공의 체제를 민영으로 바꾸자는 의견을 냈고 박충훈상공장관은 지금대로 국영이 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박의장은 '그대로 해!'라고 간단하게 정리하 더니 일어나면서 '그렇지 않아도 민영으로 해주면 정치자금을 제공 하겠다는 업자가 있었어'라고 하더란 것이다.
걸프와의 협정이 타결된 후 박정희 정부는 나누어 받게 되어 있 던 걸프의 투자금액을 일부 앞당겨 받아 은행에 예치함으로써 외환 위기를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걸프와 정권과의 이런 밀접한 관계는 나중에 공화당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으로 발전하면서 한미관계의 한 쟁점이 된다.
걸프와의 협상에 개입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쪽은 별다른 카드를 쓸 수 없는 최악의 입장에서 협상에 임 했습니다. 그렇다고 걸프가 한국의 이런 상황을 악의적으로 이용했 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유독점 공급이나 가격 기준 등의 조건 에서는 우리가 손해를 보았지만 차관상환 조건에선 유리한 대우를 받았지요. 총체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메이저는 결코 보따리 장수일 순 없었지요. 그들 은 국제적으로 관례가 된 계약의 틀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에 적용 한 것이 다른 나라에 비해 본질적으로 불리하다는 증거는 없었습니 다.'.
미국정부는 걸프를 밀어 한국의 정유공장 사업에 투자하도록 한 바로 이시기 종합제철 건설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여 그 계획 을 좌절시켰다. 혁명정부는 1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 선철 25만 톤, 강괴 22만 톤 생산 규모의 종합제철소를 울산에 짓겠다고 했다. 소요자금은 외자 3,000만 달러와 내자 300억환(30억원) 으로 계획되었다. 1963년에 들어 주차관선인 미국의 국제개발처(AID) 는 '이 정도 규모의 제철소를 돌리는 데는 철광석과 석탄 수입에만 연간 3,500만 달러가 필요한데 한국은 연간 수출실적이 4,200만 달러(1961년)밖에 안되니 도저히 원료수입을 감당할 수 없다'면서 반대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