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의 등장
광부와 간호사들의 서독 취업과 비슷한 시기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기간산업을 건설하여 수입대체를 이룩한다는 다분히 이상적이고도 민족주의적인 당초의 계획에 제동이 걸 리면서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화와 수출중심의 경제발전 전략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5·16직후 제1차 5개년 계획을 세울 무렵 혁명정부는 종합제철소와 정유공장 건립안을 반영했었다. 근대 국가의 국력을 가늠하는 2대 전략물자를 상징하는 '강철'과 '기름' - 종합제철소와 정유공장 건설을 위해서 혁명정부는 이상적인 계획을 세웠다.
정유공장의 경우 국제석유자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 건설자금을 민족자본, 즉 내자를 확보하여 조달하기로 했다. 1962년9월10일 정부는 6억2천5백만 원을 1차 불입금으로 하여 대한석유공사를 설립하 고 초대 사장에 이성호 전 해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그해 10월17일엔 미국의 플루어사와 공장건설 계약을 맺었다. 총공 사비는 1,599만7천 달러. 유공은 공사비의 10%를 계약금조로 플루어사 에 지급했다. 플루어사는 이 공사를 따기 위해 6·25전쟁 때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를 한국으로 보내 로비를 벌이기도 했었다. 1963 년봄부터 물새 울고 잡초 무성한 울산 태화강변에 정유공장 기자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963년 박정희 정부는 물가폭등, 흉작에 따른 식량부족 사태, 미국 측의 원조동결 조치, 외국차관 도입의 차질 등 경제위기를 겪는 과정 에서 정유공장의 건설 포기를 거론하기도 했다. 대한석유공사에 대한 정부의 2차 출자도 미뤄졌다. 플루어사에 대한 중도금도 제대로 지급 하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정부 일각에선 플루어사에 준 계약금을 떼이 더라도 정유공장 건설을 중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성호 사장은 박충훈 상공장관과 함께 박의장을 찾아갔다. 이사장 은 '외국 자본의 도입 없이는 정유공장 건설이 어렵다'고 보고했다.
박의장은 '이 어려울 때 정유공장을 꼭 지어야 하는가'라고 물었 다. 이사장은 '꼭 지어야겠다'고 버티었다. 박의장은 다시 '다른 방법 이 없을까'라고 또 물었다. 이 사장은 '없다'고 대답했다. 박의장은 '좋다. 외자를 도입해서 지어라. 외자 도입에 따른 전권은 이 제독에 게 준다'고 말했다.
이성호 사장은 당시 한국내의 석유판매권을 독점하고 있던 코스코 사의 세 회원사인 칼텍스, 쉘, 엣소(엑슨의 전신)와 접촉해보았다. 신 통한 반응이 없었다. 며칠 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손님이 재향군인 회장실로 이사장을 찾아왔다. 이사장은 재향군인회장을 겸직하고 있었 다. 장대한 몸집에 반들거리는 대머리의 소유자는 자신을 미국 걸프석 유회사의 극동지역 조정관이라고 소개했다. 30대 후반의 굿맨은 하버 드 대학을 나와 한때는 캄보디아 등 동남아의 미국 대사관에서 일한 경험이 많아 아시아통으로 알려져 있었다. 굿맨은 유공정유공장에 투 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는 에드워드라는 변호사를 데리고 왔다.
즉답을 피한 이성호 사장은 며칠 뒤 도쿄로 가서 그곳에 있는 메이 저 석유회사들의 현지 책임자들, 그리고 일본의 해외석유개발 회사를 방문하여 합작의사를 타진했다. '흥미가 있으면 내가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계획서를 내달라'고 말했다. 계획서를 낸 회사는 걸프뿐이었다.
굿맨의 계획서는 구체적이어서 협상초안이라고 할 만했다. 더구나 액 수가컸다. 걸프는 2,5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당시 한국의 연 간 수출액의 반이나 되는 액수였다. 이성호 사장은 서울로 돌아와 박 정희의장에게 보고했다.
박의장은 '우선 짓고 보자'면서 걸프와의 합작협상을 지시했다.'정 유회사만은 민족자본으로 건설하여 미국측의 영향력을 막아보자'고 생 각했던 박정희로서는 현실적 판단을 한 셈이다. 그의 머리에는 북한이 작은 정유공장을 지어 이미 가동하고 있다는 것이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의장의 결단에 따라 이성호 사장은 전민제이사를 위원장으로 하 여 10여 명의 사내 간부로 '대한석유공사 원유구입 및 차관교섭위원회' 를 구성했다. 상공부의 오원철(뒤에 중화학공업담당 경제수석비서관 역임), 경제기획원의 황병태(뒤에 민자당 국회의원), 재무부의 이재설 (뒤에 체신부장관)과장들도 협상과정에 간여했다. 법률자문을 맡은 사 람은 최덕빈, 김흥한 변호사였다.
걸프가 한국에 투자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쿠웨이트 사정이 있었 다. 걸프는 1938년 쿠웨이트에서 불간 유전이란 세계최대의 기름밭을 발견했다. 당시 매장량은 720억 배럴. 1946년부터 이 유전이 생산을 개시했다. 걸프는그 뒤 볼리비아, 나이제리아, 콜롬비아에서도 잇따라 거대유전들을 발견했다. 걸프의 문제는 석유생산은 많은데 판로가 약 하다는 점이었다.
메이저 석유회사의 실력은 생산-수송-정제-판매의 단계별 유통과정을 수직으로 통합하여 기름을 그 수직 폐쇄회로에 따라 굴려감으로써 한 단계씩 거칠 때마다 이익을 얻는 일관체제에서 우러나온다. 생산에 는 강하고 판매에는 약했던 걸프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석유소비지 에 정유공장을 세운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때 정유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시장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