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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드라이브
 수출 드라이브
 
 박정희 정부는 종합제철을 건설하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부정축재 기업인 8명으로 하여금 투자공동체를 설립하게 한 뒤 서독으로 보내 차 관교섭을 하도록 했다. 그런 한편 미국으로는 민간 교섭단을 보내 투자 자를 찾았다. 한때는 우리 정부가 서독과 미국 양쪽의 투자선을 놓고 장단점을 비교할 정도였다.
 
 1962년 12월30일 우리 정부는 미국측의 조건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뒤 한미합작 종합제철 건설 기본계약을 김유택 기획원 장관, 이정림 한국종합제철 사장, 포이 미 투자공동체대표간에 체결하였다. 연산 31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 공장을 외자 1억1,780만 달러, 내자 49억549만 원(3,780만 달러)을 들여 42개월 이내에 울산에 짓기로한다는 것이었다.
 
 웨스팅 하우스 등 4사로 구성된 미국 투자공동체는 외자의 75%를 미국의 외국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AID) 차관으로 조달키로 했었다. 1963 년에 들어서면서 AID는 투자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던 것 이다. 왜 미국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에 제동을 걸었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학자들의 흥미 있는 연구 주제가 되고 있다. 경제정책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자율성과 미국의 영향력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한 사례 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경제정책에 도 구체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5·16 이전 한미 두 나라는 재정안정 계획이란 것에 합의하여 시행하고 있었다. 혁명정부는 5·16 이후 적극 적인 공업화 계획을 추진하면서 이 계획을 무시했다. 이 계획은 분기별 자금 수요를 재정, 금융, 외환의 3대 부문별로 잡아 목표액을 설정한 것이다. 물가상승과 재정적자를 막기 위한 관리계획이었다.
 
 1962년 6월 군사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통화개혁이 실패로 끝나 고 경제 전반이 자금난으로 잘 돌아가지 않자 박정희는 단기적으로 통 화팽창을 통한 경기부양을 꾀했다. 미국의 대한 원조기관인 유솜(USOM) 은 한국측에 대해 물가안정계획의 부활을 요구하고 나왔다. 미국측은 박정희 정부의 과욕이 물가상승을 유도하고 이는 정치불안을 유발하고 말것이라고 경고했다.
 
 1963년 한국 정부가 경제위기에 직면하여 미국에 대한 추가 원조를 요청하자 미국은 재정안정계획, 외환수급계획, 물자수급계획에 관해 미 국측의 권고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측의 다짐을 듣고 추가 원조를 약속했다.미국은 또 한미경제협력위원회란 상설 기구를 만 들어 한국의 경제정책에 대한 개입을 제도화했다.
 
 이런 사정에 따라 1963년도 예산도 축소조정될 수밖에 없었고 제1차 5개년 계획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외자확보에 실 패한 종합제철 건설 계획은 최소된 것이다. 1964년1월 박정희 정부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보완하고 수정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 보완계획엔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려고 했던 수입대체 산업 육성 전략을 수정하여 수출주도로 전환한다는 뜻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 보완계획은 1차 5개년 계획 기간중의 연평균 성장률 목표치를 7 .1%에서 5%로 줄였다. 투자배분에선 농업에서 공업으로 중심을 옮겼 다. 투자 재원의 조달에서도 당초 계획보다 정부 몫을 줄이고 민간 몫 을 늘렸다. 수출 목표 전체는 줄였지만 공산품 수출 목표는 4배 정도로 늘렸다. 이는 1963년도 상반기에 벌써 1차 산품의 수출이 부진한 대신 공산품의 수출이 좋은 성적을 올리기 시작한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브라질 이민선 출발, 서독에 광부 및 간호사 진출, 한일국교정상화 추진, 월남파병 검토, 통화개혁에 의한 내자동원의 실패, 울산정유공장 에 걸프의 투자, 재정안정계획의 부활, 제1차 5개년 계획 수정, 수입대 체정책의 포기와 공산품 수출의 적극적 추진···. 이런 일련의 사건 들은 아무 연관성 없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 정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박정희 정부는 명분론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 의를 버리고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개발전략을 선택한다. 이는 국내가 아닌 세계를 민족의 활동공간으로 삼겠다는 역사적 결단이었다.
 
 1963년을 전후한 이런 국가적 선택은 대한민국을 세계 속으로 내던 져 극심한 생존경쟁을 자초했다. 한국인의 핏줄 속에서 잠들어 있던 야성과 생존력은 이런 경쟁체제에 편입됨으로써 강제된 극한상황에서 부활한 것이다.
 
 1964년에 들어서면 박충훈 상공장관의 지휘하에 수출드라이브 정책 에 가속도가 붙는다. 수출업자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장치가 이때 갖추 어진다.
 
 ·수출입 링크제: 수출업자에게 수출액과 같은 액수의 수입권을 인 정, 소요 달러를 배정함으로써 수출에 성공하면 특혜를 받을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했다.
 
 ·기술소득 제도: 원료를 수입하여 수출품을 만들 때 거기에 들어간 원료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절약하고 생산성을 높여 수입한 원 자재를 적게 사용했을 경우 남은 원자재에 대해서도 세금을 면제해주었 다.기술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출품 생산업체 지정: 1964년에 165개 업체를 지정, 시설자금 및 외화의 배정에 우선권을 주었다.
 
 박대통령은 이즈음 '우리나라가 잘되려면 직업의식이 사농공상에서 상공농사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무역에 가장 역점을 두고 직접수출정책 을 꼼꼼이 챙기기 시작한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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