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한국군의 서울 진주 허용
3·24 학생시위를 집중적으로 보도한 신문들은 '대학가 휩쓴 뜨 거운 바람' '플래카드에 나부낀 애국심'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노래 부르며 의사당까지 밀고 가' '연도의 시민들도 합세'몽 둥이 세례가 웬말이냐···분노의 행진' '민족적 양심의 대학생 데모' '지성의 격랑, 정가를 뒤덮다'란 제목들이 보여주듯이 시위 대에 호의적이었다. 야당의 선동과 언론의 이런 응원은 시위를 전 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25일엔 서울에서 11개 대학과 4개 고교, 그리고 지방의 6개 대학이 참여하는 전국 시위로 확대되었다. 26일 에도 시위는 전국적으로 계속되었으나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정부는 군의 무장 병력을 동원하여 청와대로 통하는 길목에 바 리케이드를 쳤다. 전날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가진 미8군 사령관 하우즈 장군에게 시위대로부터 청와대 와 중앙청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2개 예비사단 및 특전부대 소속 병력 1,500명을 서울에 진주시키고 싶다고 동의를요청했다. 하우즈 장군은 사뮤엘 버거 주한미국대사와 의논한 뒤 병력이동을 허가했다.
이 병력은 26일 새벽에 서울로 들어와 수도경비사 병력을 지원 하게 되었다. 최루탄과 소총으로 무장한 군병력은 청와대와 중앙청 으로 통하는 간선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민기식 총장은 하우즈 사령관에게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넘으면 최루탄을 쓸 것이고 시 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넘어 청와대로 쳐들어가는 식의 긴급할 경우 에만 발포할 것이다'고 말했다.
미군측이 한국군측의 병력이동 요청을 쉽게 받아준 것은 한일회 담의 성사를 갈망하는 미국정부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4·19 학 생 시위때와 1964년 학생시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4년 전에 학생 과 야당편에 섰던 미국정부가 이때는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 게 되었다는 점이다.
1964년 3월26일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자민당 소속 김준연 의원이 '정통한 소식통으로 부터 지난 20일 들은 바에 의하면 박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1억3000 만불을 받았다고 한다. 작년 1월 김동하 전 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이 '공화당의 정치자금 루트를 알면 국민은 질겁을 할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구체적인 증거를 대지는 않았다. 김용태 공화당 총무 는 '김 의원은 자유당 정권 시절에도 원내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을 이용하여 뉴델리에서 신익희(초대 국회의장)-조소앙(납북) 밀담이 있었다고 모략한 사람인데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조사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제명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김준 연의 이폭로는 완전한 조작이었다. 야당의 무책임한 선동에 대해서 는 매우관대했던 우리 언론은 김준연에 대해서 그 책임을 따진 적 이 없다.
오히려 근거없는 폭로를 정치쟁점으로 만들어 크게 보도함으로 써 야당과 학생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불렀다. 권력에 대한 저항이 용기로 치부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약자의 행패와 억지는 강자의 오만과 무리만큼(때로는 그 이상으로) 관대하게 넘 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날 박 대통령은 단호한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학생들 의 우국충정은 이해하나 외교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그 는 '나는 오늘 한일회담에 임하고 있는 우리 대표들에게 여러분들 의 그 주장과 정신을 명심하고 굳건히 회담에 임하여 우리의 주장 이 관철되도록 하라는 훈령을 보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또 '시위는 의사를 표시하여 정부정책에 그 뜻을 반영시키는 수단은 될지 모르지만 전체 국민의 의사로써 세운 정부를 제약하고 그 뜻 대로 해줄 것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대통령은 또 이날있었 던 김준연 의원의 조작된 폭로에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이 정부의 누구이든 흑막에 관계가 있다면 나는 그를 역 적으로 규정하고 처단함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27일 상오 대통령비서실장 이후락은 '대통령은 정일영 외무차관 에게 현재 일본에 체류중인 김종필 당의장을 28일중으로 귀국시키 도록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마치 대통령이 한일 정치회담을 벌이 고 있는 김종필에게 소환명령을 내림으로써 회담을 일시 중단키로 한 것처럼 비친 발표였다. 공화당이 발끈했다. 의원총회는 이후락 실장을 소환하여 '원래 김종필 의장은 28일에 귀국하게 되어 있는 데 소환은 무슨 소환이냐'고 따졌다.
이후락은 '나는 대통령이 김 의장에게 예정대로 28일에 귀국하 도록 지시했다고 발표했을 뿐이다'고 해명했다. 이즈음 이후락은 '대통령의 당외 제1측근'이라 불리면서 김종필로 대표되는 공화당 의 주류와 갈등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3월28일 김종필 의장은 일본에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린 김 종필은 다소 피로해 보였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귀국인사를 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고독과 고립속에서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느꼈습니다. 본인도 학생 이상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있는 입장에서 학생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은 만나서 대화를 통해서 풀도록 하겠습니다.'.
이날 국회 본회의는 야당이 제출한 엄민영 내무장관 해임결의안 을 표결에 부친 결과, 재석 152명 중 찬성 77명, 반대 71명, 기권 4명으로 재적의원 과반수선인 88표에 미달, 부결되었다. 공화당에 서 20명정도가 반란표를 던진 것으로 밝혀져 당내의 균열을 드러냈 다.
(조갑제출판국북구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