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준비
1964년4월4일 미8군 사령관 하우즈 장군이 김성은 국방장관과 나눈 대 화록에는 우리 정부가 주한미군의 감축 가능성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김장관은 하우즈에게 '만약 미국이 주한미 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이라도 빼간다면 우리는 그에 상응한 병력증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래야 외국자본의 투자에 유 리한 (안정된)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외자도입에 의한 경제개발 전략을 세운 박정희 정부로서는 안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계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주한미군을 붙들어 놓는 방법으로써 한국군의 월남파병을 미국측에 먼저 제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하우즈 장군을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이 잠수함 두 척을 가 지고 있는데 국군도 잠수함을 도입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물었다. 하우즈 사령관은 '잠수함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경비가 들기 때문에 사치품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하우즈는 그 대신 한국 해군이 대잠수함 작전훈련을 강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측에서는 이미 한국 해군이 잠수함의 전술과 회피동작을 더 정확 히 이해할 수 있도록 미국 잠수함에 한국군 장병들이 훈련·교육 목적으 로 탈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박대통령은 최근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사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시위는 오도된 애국심과 야당의 선동에 의한 것이다. 이런 사태 는 한일국교 정상화의 진전에 극히 작은 영향을 끼칠 뿐이다. 한편 우리 정부는 학생들과 공무원들을 상대로 국교정상화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나는 일본을 방문중인 정일권 외무장관을 통해서 일본측 에 회담에 임하는 우리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통보하도록 했다'
4월에 들어서 학생시위는 잠잠해졌지만 이때 박대통령은 민기식육군참모총장에 게만 비밀리에 지시하여 계엄령 실시 계획을 미리 짜두도록 했다. 민기식 총장은 경기도 양평에 주둔하는 15사단(사단장 이병엽 준장)과 강원도 철 원 근방의 제6사단(사단장 김재규준장)을 출동부대로 선정, 작전준비를 명령했다. 민총장은 육군방첩대장과 작전참모에게만 이사실을 알리고 다 른 장관들에게도 비밀에 부쳤다. 그는 미군측에 이런 동향이 새나가는 것 을 경계했다.
서울에 중대 사태가 발생하면 서울로 진입할 계엄부대로서 두 사단은 통신망 설치, 점령장소 확인, 진입로 점검, 이동시간 측정, 야간이동 준 비, 언론통제 준비, 대민정책 준비 작업 등을 조용히 하고 있었다. 박정 희는 겉으로는 참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뒤로는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3월31일 박정희는 정일영외무차관에게 지시하여 대학생 대표들에게 청 구권 금액 등에 합의한 김종필 - 오히라 메모의 내용을 공개했다. 진행중 인 외교 협상의 중요한 내용을 공개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 구나 국회에서가 아니라 대학생들 앞에서 공개한 것은 정부가 할 일이 아 니란 비판도 있었다. 박정희로서는 학생들을 부추겨 거리로 내몰아 정치 의 상당부분을 젊은이들에게 내어준 언론과 야당이 이제 와서는 딴 소리 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학생·언론·야당에 대한 나쁜 시 각이 이때에 형성되고 이는 평생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게 된다.
3월30일 차관회의에서는 중고생들의 시위 대책을 논의하다가 차관들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한 차관이 문교부 차관에게 '제발 그 철부지 들은 데모에 나서지 않도록 잘 단속하시오'라고 했다. 문교차관은 '정부 가 데모를 애국행위로 규정해놓고 이제 와서 대학생은 좋으니 중고생은 안된다고 하면 중고생은 그러면 애국을 하지말라는 말입니까. 유관순이 독립운동할 때 몇 살이었는지 아십니까'.
39세의 김종필 당의장은 3월31일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앞으로는 한일 교섭에 관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4월1일 만우절을 맞아 '박대통령 하야, 윤보선 중태'란 풍설이 정가를 휩쓸었다. 다음날은 거짓말 같은 일 이 사실로 벌어졌다.
'넘치는 전력, 수요 부족이 문제'란 제목의 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한 달 전에 있었던 부산 감천화력 발전소 1호기의 준공으로 6만6천 킬로와트의 용량이 추가되는 바람에 발전용량은 53만 킬로와트가 되었고 전력수요는 43만 킬로와트로서 제한송전이란 말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연말에는 시설용량이 70만5천 킬로와트로 더 늘어나게 되어 이 제는 남는 전력이 골치거리로 등장했다고 언론은 전했다. 군사 혁명정부가 추진한 전원개발사업이 실효를 거둔 것이었다. 한국인의 생활양식에 큰영향을 끼친 이런 업적도 정치의 계절에는 묻혀 넘어갔다. 박정희는 묵 묵히 건설하는 사람의 땀보다도 비난하고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더 크 게 보도하는 언론의 생리에 대하여 항상 불만을 갖고 있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